2023/11/09

인간 지네



과학학과에서 경기도 여주로 워크숍을 다녀왔다. 낮에 신륵사와 영릉에 갔다가 저녁 때 숙소에서 레크리에이션 같은 것을 했다. 프로그램 중에는 교수와 학생이 조를 이루어 문제를 맞추는 것도 있었다. <그림으로 말해요>라는 코너였는데, 주제별로 어떤 단어를 제시하면 조에서 한 사람당 5초씩 해당 단어를 그림으로 그려서 표현하고 남은 한 사람이 맞추는 것이었다. 우리 조가 고른 주제는 ‘직업’이었다. 다른 주제보다는 훨씬 표현하기 쉬워 보여서 조원들이 안심했는데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요, 만약에 변리사를 그려보라고 하면 어떻게 하죠?” 내 말에 조원들이 일순간 멈칫했다. 다행히 그런 문제는 나오지 않았다.

소방관을 표현하는 건 비교적 쉬웠다. 문제는 대학원생을 그림으로 표현하는 것이었다. 내 앞순번의 사람들이 방, 의자, 책상 등을 그렸다. 나는 대학원생의 좌절, 고뇌, 슬픔을 대충 다음과 같은 그림으로 표현했다. 시간이 부족해서 눈물을 못 그렸다.

나 다음 순번의 사람이 눈물을 마저 그려넣었다면 좋았을 텐데 나와 똑같은 그림을 연이어 두 개 더 그렸다. 그래서 모양이 약간 흉측하게 되었다.

다행히도 새로 부임한 신임 교수님은 그 그림을 보고 대학원생임을 알아맞혔다.

레크리에이션이 끝나고 간단히 술을 마실 때, 나는 좌절한 대학원생 그림이 연달아 세 개가 붙어있는 것을 보고 사람들이 ‘인간 지네’라고 할까봐 걱정했다고 말했다.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그 말을 못 알아들었다. “인간 뭐요?” 이름을 알지만 잘 모르는 사람도 있었다. “인간 지네라고 이상한 게 있다고는 듣기는 들었는데 잘 모르겠네요.” 중학생 아들에게서 인간 지네라는 것을 들어봤다는 분도 있었다. 그게 뭔가 궁금해서 물어보니 아들이 말을 하다 말았다고 한다. 나는 그 분께 아들이 중학생이라니 일단 혼내라고 말했다.

그 와중에 신임 교수인 과학정책 선생님이 “풉!”하고 웃었다. 내가 “어? 선생님은 아시죠?”라고 물으니 과학정책 선생님은 금세 표정을 바꾸고 “모릅니다”라고 답했다. 아무래도 신임 교수님은 인간 지네 시리즈를 아시는 것 같다.

(2023.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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