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우시크 순데르 라잔의 『생명자본: 게놈 이후 생명의 구성』을 일부 훑어보았다. 그 책을 읽으려고 작정하고 읽은 것은 아니고 온라인 중고서점에 등록해놓은 게 팔려서 상품 포장하기 전에 한 번 훑어본 것이다. 마침 펴본 곳에 이런 구절이 있었다.
생명윤리학이 소유권과 관련된 질문들에 왜 그토록 관심을 두지 않는가 하는 문제는 흥미로우면서도 중요하다. 주된 이유 하나는 그 학문의 성격과 교수법에서 나온다. 특히 미국에서 제도화된 생명윤리학은 대체로 분석철학에서 비롯되는데, 분석철학은 노골적으로 ‘정치적인’ 의문들보다는 규범적인 질문들에 훨씬 더 적극적으로 반응한다. (106쪽)
이건 또 무슨 소리지? 분석철학이 무슨 잘못을 했을까? 이렇게 대충 뭉뚱그려서 대충 말하는 것을 보니 어디서 스캣의 냄새가 솔솔 나는 것 같다. 글은 다음과 같이 이어진다.
그러나 무어 소송은 단순한 법적 선례 이상의 역할을 해왔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그것은 더 나아가 규범적 선례가 되어 어떤 식으로든 소유권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암시한다. 이 점은 지적 재산권 체제에 대한 도전들이 왜 그 번잡하고 예측 불가능한 공공 영역에서, 그 번잡하고 예측 불가능한 정치적 통로를 통해, 훨씬 더 자주 제기되는지 설명해 준다. 전문가의 중재라는 ‘분별’을 통해 그러한 번잡함을 전달하고 규제하는 제도화된 영역에서 도전이 이루어지지 않고서 말이다. 다시 말하자면, 문제가 되는 것은 생명윤리학의 내용만이 아니다. 제도화된 생명윤리학이 어떻게든 ‘윤리적인’ 제도가 되려고 애쓰는 때조차도 그것을 그토록 비민주적인 제도로 만드는 것은, 바로 그러한 논쟁에서 전문가로서 다른 관계자들의 목소리를 배제시키는 생명윤리학자들의 중재이다. (106쪽)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는데, 일단 무어 소송이 단순한 법적 선례 이상의 역할을 했다는 것과 생명윤리학자들이 사회적인 논쟁에서 전문가로서 다른 관계자들의 목소리를 배제하기 때문에 제도화된 생명윤리학은 비-민주적인 제도가 된다고 저자가 주장한다는 것까지는 알겠다. 그렇다면, 무어 소송이 무엇인지, 생명윤리학자들이 어떤 짓을 하는지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무어 대 캘리포니아대학읜 평의원 소송(이하 무어 소송)은 “인간의 몸에서 나온 생물학적 물질에 대한 특허 자격과 관련”된 사건이다.(97-98쪽) 캘리포니아대학의 연구진은 비장 절제 수술은 받은 존 무어의 세포를 독특한 세포 라인으로 전환하고 특허를 받았다. 이 과정에서 연구진은 이러한 사실을 무어에게 알리지도 않았고 동의받지도 않았다. 무어는 연구진이 자신의 비장 세포 파생물로 특허를 받은 것에 대하여 재산권의 일정 지분을 요구하는 소송을 걸었다. 캘리포니아 대법원에서는 절차상의 문제점을 인정했지만 세포 라인을 연구원들의 ‘발명’으로 보고 무어의 재산권을 인정해주지 않았다.
여기까지는 흥미로운 사건인데 그래서 생명윤리학자들이 어떤 행패를 부렸나? 어떤 놈들이 청부 윤리학자 짓을 했는가? 명확하게 나오지는 않는다. “생명윤리학은 명백히 Rep-X가 관심을 갖고 있는 핵심 분야”이고 “이는 오늘날 생명공학 회사에 드문 일이 아니”며 “실제로 Rep-X에는 생명윤리학자가 근무하고 있다”(102쪽)고 한다. 라잔은 Rep-X의 최고 경영자의 인터뷰도 인용한다.
“더 많은 회사들이 그렇게 하지 않는 것(생명윤리학자를 고용하지 않는 것)이 놀랍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어떤 손실도 주지 않으면서 종국에는 우리를 구제해 줄 수 있으니까 말입니다. 제 말은, 그 아이디어 자체가 매우 합리적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늘 말하는 것은, 우리가 『뉴욕 타임즈』의 1면을 장식할 거면 제대로 된 방식으로 할 필요가 있다는 거지요.” (102-103쪽)
정리하자면, Rep-X 같은 기업에서 특허와 관련한 소송을 대비하여 생명윤리학자를 고용한다는 것이다.
얼핏 본다면, ‘피도 눈물도 없는 생명윤리학자 놈들이 사람 냄새 나지 않는 분석철학이나 배우더니 결국 거대 기업의 앞잡이 노릇이나 하는구만?’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런 게 아니다. 분석철학을 영미법이나 대륙법으로, 생명윤리를 형법이나 민법으로, 철학자를 변호사로 바면 기업의 법무팀이 된다. 기업이 법무팀을 갖추는 것이 비난받을 일이 아닌 것처럼 생명윤리학자를 고용한 것도 비난받을 일이 아니다. 기업이 법무팀을 이용해 비난받을 일을 할 경우 비난받아야 하는 것은 영미법 체계나 대륙법 체계가 아니라 해당 기업인 것처럼, 기업이 생명윤리학자를 통해 비난받을 일을 한다면 비난받을 것은 분석철학이 아니라 해당 기업이다. 그러니
제도화된 생명윤리학이 어떻게든 ‘윤리적인’ 제도가 되려고 애쓰는 때조차도 그것을 그토록 비민주적인 제도로 만드는 것은, 바로 그러한 논쟁에서 전문가로서 다른 관계자들의 목소리를 배제시키는 생명윤리학자들의 중재이다. (106쪽)
같은 말은
제도화된 법학이 어떻게든 ‘법적인’ 제도가 되려고 애쓰는 때조차도 그것을 그토록 비민주적인 제도로 만드는 것은, 바로 그러한 논쟁에서 전문가로서 다른 관계자들의 목소리를 배제시키는 법률가들의 중재이다.
만큼이나 무의미한 말이다. 내가 스캣의 냄새를 잘 맡기는 맡았던 것이다.
책을 몇 부분 더 살펴보면 라잔이 왜 분석철학에 대해 근거 없는 적개심을 보이는지 대충 짐작할 수 있다. 용찬우도 아니고 철학자나 유사-철학자가 없으면 말도 못 하는지 뻑 하면 그들의 말을 인용하는데, 왜 인용하는지 밝히지도 않는다. 뻑 하면 맑스, 뻑 하면 니체, 뻑 하면 데리다가 나오지만, 그렇게 인용한 것이 논의하는 내용을 풍부하게 하는 것도 아니고 설명을 돕는 것도 아니다. 불필요하고 무분별한 인용에 분석철학이 걸림돌이 된다고 생각한다면 라잔이 분석철학에 적개심을 느끼는 것도 이해할 만하다.
내가 보기에, 자본의 유통과 교환과 뭐시기라는 부분도 아무 내용도 없으면서 무언가 특별한 것이 있는 것처럼 위장하기 위해 쓸데없는 말이나 잔뜩 늘어놓은 것에 불과하다. 잡다한 말을 다 빼고 기업들이 어떤 식으로 사업한다고만 서술해도 아무 문제가 없다. 가령, “어떤 기업의 마케팅은 미래에 어떤 것을 하겠다는 과장 광고를 하며 돈을 뜯어내는 것에 불과하며 그렇게 뜯은 돈으로 사업을 한다”고 한 문장으로 쓸 수 있는 내용을 라잔은 다음과 같이 한 문단으로 만든다.
약속의 마케팅이라는 수사 또는 구조라는 관점에서 나는, 생명공학과 신약 개발로부터 나오는 상업적 가치 생산을, 그것을 위해서 필요한 시간적 지연에 연결하는 두 가지 주장을 제시하고자 한다. 첫째, 특정한 종류의 미래가 가능하도록 현재 가치를 생산하기 위해서는, 그러한 미래에 대한 비전이 팔야만 한다. 그것이 결코 실현되지 않을 비전이라도 말이다. 과잉과 지출, 흥분, 위험, 그리고 도박은 예상할 수 없는 것 혹은 상상할 수 없는 것을 창조하기 때문에 생산적이다. 그러나 이것은 생산의 시간적 순서가 전도될 때만 가능하다. 생산의 시간적 순서는 미래를 향해 가는 현재에서 멀어져, 현재를 감당하게 하기 위해 언제나 소환되는 미래로 간다. 미래주의적인 약속 담론인 과장 광고의 작동을 진지하게 이해해야만 한다. 과장 광고는 단순히 냉소적인 것이 아니라 미래로 하여금 현재를 감당하게 하는 담론 형태라는 것이 나의 주장이다. 그리고 과장 광고가 현실에 반대될 수도 없다는 것이 이 장의 핵심적인 이론적 주장이다. 물론 과장 광고가 냉소적으로 읽힐 때 그것은 너무나 쉽게 현실의 대척점에 서지만 말이다. 오히려 과장 광고는 현실이며, 최소한 현실이 펼쳐지는 담론적 지반을 구성한다. (178-179쪽)
이렇게 한 문장을 한 문단으로 바꾼 다음 니체를 끌어들인다.
비전과 과장 광고, 투기, 시간성은 모두 가치에 대한 의문들과 연결된다. 프리드리히 니체가 말하듯 “그 훌륭하고 명예로운 것들의 가치를 구성하는 것은, 다름 아닌 이 사악하고 명백히 대조되는 것들에 교묘하게 연결되고 매듭지어지고 꿰매어져 있기 때문에, 심지어 그것들과 본질적으로 동일하기 때문에 존재한다”(Nietzsche, 1973[1886]: 16). (179쪽)
이 글에서 니체를 끌어들일 필요가 없었음을 알기 위해 굳이 니체의 철학까지 알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그래도 이 책을 훑어보고 얻은 것도 있었다. 라잔의 분석이 유효한지와는 별개로, 책에는 나름대로 유용한 정보도 약간은 있어서, 철학자들이 미처 알지 못한 흥미로운 사례를 취합하는 용도로 쓸 수도 있다. 가령, Rep-X에 대한 라잔의 분석은 매우 의심스럽지만 라잔이 소개한 Rep-X 사례 자체는 흥미로운 구석이 있다.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간다면, 이 책을 통해 생명윤리 전공자들이 철학 이외의 다른 분야에 개입할 여지를 포착하는 데도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가령, 『생명자본』과 관련한 논문을 보았더니 해당 논문의 저자가 온갖 아는 척에 너스레를 떨었지만 정작 Rep-X에 고용된 생명윤리학자가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했는지 잘 모르는 것 같다거나 무어 재판의 논점을 놓쳤음을 발견했다고 해보자. 대충 몇 가지 사실 관계만 추가한 논문을 써서 해당 학술지에 투고할 수도 있을 것이다. 별다른 노력 없이 실적 하나를 추가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이렇게 본다면, 어떤 책에서 스캣의 냄새가 난다고 해서 곧바로 책을 덮을 것이 아니라 혹시라도 쓸만한 것이 있는지 뒤적일 필요도 있겠다. 이것이 『생명자본』을 훑어보며 얻은 나름대로의 교훈이다.
* 참고 문헌
카우시크 순데르 라잔, 『생명자본: 게놈 이후 생명의 구성』, 안수진 옮김 (그린비, 2012)
(2023.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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