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3/07

한국어 어순과 비판적 사고



몇 달 전, 유튜브 광고로 어느 공무원 영어시험 강사의 강의 1강을 보게 되었다. 영어 강의 1강이면 보통은 영어 공부를 할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설명할 것 같은데, 그 강사는 영어의 특성을 알아야 영어를 쉽게 공부할 수 있다면서, 한국어와 영어의 어순이 왜 다른지를 생각해보아야 한다고 했다. 나는 해당 강사에게 언어학적인 배경이 있는 줄 알았다. 그런데 그런 것은 전혀 아니었다. 강사는, 우리가 농경민족이라서 어순이 ‘주어-목적어-동사’이고, 서양 사람들은 유목민족이라서 어순이 ‘주어-동사-목적어’라고 설명했다. 너무 놀라운 내용이어서 건너뛰기를 하지 못하고 1강을 다 보았다. 분명히 강사가 나보다 어린 것 같았는데, 내가 30년 전에 들었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농경민족은 이동하지 않으니까 어떤 대상인지가 더 중요해서 동사보다 목적어가 앞에 오고, 유목민족은 빨리 이동하는 것이 중요하니까 동사가 목적어 앞에 온다니. 그런데 20-30년 전만 해도 그런 류의 개소리는 횡행했고, 사람들은 그런 소리를 듣고도 똥인지 된장인지도 모르고 일리가 있네 어쩌네 하면서 좋아했다. 나이 많은 사람들은 언제부터 자기가 지성인이었다고 요즈음 애새끼들은 책을 안 읽네, 사고력이 부족하네, 비판적 사고를 못하네, 가짜 뉴스가 횡행하네 어쩌네 하지만, 정작 20-30년 전만 해도 가짜 뉴스가 공중파를 타고 나오든 신문 지면으로 나오든 사람들이 죄다 믿을 정도로 한국 사람들은 미개했다.

내가 중학생 때 들은 이야기 중에는 한국인이 어순 때문에 비판적 사고를 잘 못한다는 것도 있었다. 영어는 어순이 ‘주어-동사-목적어’라서 상대방의 말이 끝나기 전에 상대방의 말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하는데, 한국어는 어순이 ‘주어-목적어-동사’라서 상대방의 말을 다 듣고 나서야 생각하기 때문에 비판적 사고가 힘들다는 것이었다. 물론, 이건 개소리이고, 영어 실력과 상관없이 논파할 수 있을 정도로 허술한 개소리이다. 다음과 같은 예문을 생각해보자.

(1) 이준석은 20대 청년들의 희망이다.

(1′) Lee Joon-seok is the hope of young people in their 20s.

내일모레면 마흔 살이 되는 이준석이 20대 청년들의 희망이라고? 왜? 나는 20대 청년들이 어떤 20대 청년들인지 아직 말하지 않았다.

(2) 이준석은 민주당을 지지하는 20대 청년들의 희망이다.

(2′) Lee Joon-seok is the hope of young people in their 20s who support the Democratic Party.

이런 단순한 예문을 보아도 어순론자들의 주장이 얼마나 말이 안 되는지를 알 수 있다. 해당 예문에서는 한국어 청자가 영어 청자보다 더 빨리 상대방의 의견에 대한 판단을 시작할 수 있다. 그러니 “한국말은 끝까지 들어보아야 알 수 있다”는 말은, 한국어의 구조적 문제 때문에 벌어지는 피할 수 없는 일이 아니라, 한국 문화가 후져서 말을 개떡같이 하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을 가리키는 것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20년 전 사람들은 멀쩡히 대학을 졸업하고도 어순 같은 소리나 듣고도 일리가 있다고 할 정도로 비판적 사고를 못 했던 것이다.

20-30년 전 어순론자 같은 사람들이 펼쳤던 주장을 살펴보면, 한 가지 흥미로운 측면을 발견할 수 있다. 바로, 한국이나 한국인의 부족한 점을 바꿀 수 없는 요소와 결부짓는 경향이 있었다는 점이다. 한국인이 비판적 사고를 잘 못하는 원인이 교육 방식이라면 교육 제도를 뜯어고치든 교사를 족치든 해서 바꿀 수 있는데, 어순 때문에 그렇다고 하면 그냥 그렇게 살다가 죽는 수밖에 없다. 영어 능통자가 되지 않는 이상 어떻게 어순을 바꾸겠는가? 그런데 그 뒤로 20-30년이 지났고 한국어의 어순은 바뀌지 않았는데도 아무도 어순 때문에 비판적 사고가 어렵다고 하지 않는다. 그 때 그딴 소리를 하던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는가? 다 얼어 죽었나? 아니다. 다 살아있고 다 건강하다.

어순론 같은 그런 식의 건강하지 않은 사고방식이 아시아 전체를 풍미하기도 했는데, 소위 말하는 ‘아시아적 가치’라고 하는 것이 그것이다. 아시아적 가치 덕분이 동아시아가 경제 성장을 했다는 둥, 독재가 어쨌다는 둥, 별 소리를 하더니, 지금은 아무도 그런 소리를 하지 않는다. 동아시아의 고도 성장을 ‘유교 자본주의’라고 한다면 인도의 고도 성장은 ‘힌두 자본주의’라고 불러야 할 것인데, 아무도 그딴 소리를 하지 않는다. 어순론이든 아시아적 가치든 사고방식이 건전하지 않았던 시절의 찌끄러기일 뿐이다.

그런데 당연한 말이겠지만, 옛날 사람들이라고 해서 모두 미개했던 것은 아니다. 김재권 교수 회갑기념 논문집인 『수반의 형이상학』에 실린 「추억과 회상」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 마침내 1958년 6월에 불문학, 수학, 철학을 통합한 과정을 이수한 자로서 다트머스를 졸업하게 되었다. 재학 기간 중에 수학 강좌들을 선택한 주된 이유는 영어로 논문을 쓰는 과제를 피하기 위해서였다. 철학 강좌는 다트머스에 온 지 1년 반이 되었을 때 철학과 친구를 따라 진지하게 경청하였는데 그 친구는 다름 아닌 훗날 캘리포니아 (버클리) 대학교 철학과 교수가 된 마이로(George Myro)였다. 이 친구는 실존주의 작가들에 대해서 나와 논쟁을 벌일 때마다 내가 주장하는 바를 조목조목 반박하여 사람을 곤혹스럽게 만든 장본인이었다. 그래서 (다트머스에 와서 첫 학기에 철학 입문 과목을 듣기는 하였지만) 철학을 좀더 배우면 내 논쟁 기술이 다듬어질 수 있겠는가라는 생각이 들면서 철학의 가치를 재고하게 되었다. 이 때가 바로 불문학에 대한 매력을 잃기 시작할 때였다. (15-16쪽)


이 때가 1958년이라는 것을 눈여겨보자. 1958년이면 6.25가 끝난 지 5년밖에 안 된 시점이다. 아마 그 당시 평범한 한국인이 미국 대학에서 마이로 교수 같은 친구를 만났다면, 역시나 조선놈은 안 된다고 생각을 했든지, 버터를 더 먹어야 했는데 덜 먹어서 그랬다고 생각했을 법한데, 김재권 선생은 “철학을 좀더 배우면 내 논쟁 기술이 다듬어질 수 있겠는가” 하고 생각했다. 한국이 OECD에 가입한 지 한참이 지나서도 어순론 같은 소리가 횡행했는데, 김재권 선생은 그 시절에 그런 생각을 했던 것이다.

* 참고 문헌

김재권 외, 『수반의 형이상학』, 철학과현실사, 1994.

(2022.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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