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3/13

원상복구 행정명령에 따른 흄관 제거



공사업체가 우리집 사유지에 묻은 흄관 여덟 개를 모두 제거했다. 시에서 원상복구 행정명령을 내렸고, 그에 따라 흄관 제거, 복토, 우리집 배수관 교체까지 모두 업체에서 비용을 부담했다. 업체에서 흄관을 묻을 때 포크레인이 지나가면서 우리집 배수관이 찌그러졌는데 이번에 흄관을 제거하느라 중장비가 밭에 들어온 김에 배수관까지 교체하기로 했다.

지난 달에 원상복구 방법을 논의할 때 공사업자는 오전 8시에 오겠다고 말했다. 그 때는 그런가 보다 했는데, 나중에 생각해보니 주무관이 없을 때 공사를 시작하게 하면 문제가 생길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지난 번 논의 때 공사업자가 막판 뒤집기 하려다가 들키지 않았는가? 무슨 짓을 할지 장담할 수 없었다. 나는 원래 늦게 일어나는 편인데 이 일 때문에 아침 7시 30분에 일어났다. 공사업자가 오면 일단 제지한 다음에 주무관 입회하에 원상복구 작업을 해야 한다고 말하려고 했다. 그런데 내가 잠깐 화장실에 간 사이에 공사업자가 왔고 포크레인이 이미 밭으로 들어와 있었다. 어머니가 공사업자를 제지했다.

밖에 나가서 보니 경계를 표시하러 내가 박아놓은 쇠파이프가 포크레인에 밟혀 구부러져 있었다. 공사업자는 트럭 안에 있었다. 내가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묻자, 공사업자는 입구가 좁아서 포크레인 기사보고 쇠파이프를 밟고 들어가라고 했다고 답했다. 이런 싸가지 없는 놈의 공사업자를 봤나? 집이 몇 킬로미터 떨어진 것도 아니고 걸어서 고작 30초 거리인데, 우리한테는 알리지도 않고 밭에 들어온 것이다. 나는 공사업자에게 집이 코앞인데 일을 이런 식으로 하느냐, 행정명령에 따라 하는 건데도 이러느냐, 주문관이 현장에 온 다음에 공사를 시작해야 한다고 말했고, 이에 건설업자는 알았다고 대답했다. 나는 주무관이 올 때까지 곡괭이로 땅을 까서 쇠파이프를 뽑으려고 했다.

나는 사유지와 농로의 경계를 표시하기 위해 고추막대기를 살짝 꽂았었다. 공사업체의 흄관이 우리집 사유지에 묻혀 있음을 시각적으로 잘 드러나게 하려고 고추막대기를 꽂고 현수막을 얇게 잘라서 만든 끈으로 묶은 것이다. 애초에 다시 뽑을 것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에 고추막대기를 땅에 꽂을 때 넘어지지 않고 간신히 서 있을 만큼만 살짝 꽂았다. 그러니 쉽게 뽑혀야 했는데, 그 사이에 계절이 바뀌고 땅이 얼어서 고추막대기가 도무지 뽑히지 않았다. 결국 곡괭이로 땅을 파야만 했다. 그 전날 고생하면서 고추막대기를 거의 다 뽑고 쇠파이프 두 개만 남은 것이었는데, 싸가지 없는 놈의 공사업자가 포크레인 기사보고 쇠파이프를 그냥 밟으라고 했던 것이다.

하여간 한 시간 정도 혼자서 곡괭이질을 하다가 공무원 출근 시간에 맞추어 허가민원2과에 전화했다. 담당자는 오전 10시쯤 현장에 갈 예정이라고 답했다. 올해 초에 담당자가 바뀌면서 인수인계를 받은 것 같기는 한데 문제의 심각성은 인지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나는 현재 원상복구 공사가 중단된 상태이며 주무관이 온 다음에야 재개될 예정이라고 주무관에게 말했다. 오전 10시에 온다던 주무관이 9시 30분쯤에 왔다. 건설업자가 어디론가 전화하자 포크레인이 위잉- 하는 소리를 내면서 움직였다. 포크레인에 사람이 타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어머니가 공사업자를 제지한 다음에 집 밖으로 나갔기 때문에 포크레인에 사람이 있는 줄도 몰랐다. 억울했다. 포크레인 기사가 있는 줄 알았다면 쇠파이프 좀 파달라고 했을 것이다. 왜 나는 그 추운 데서 한 시간 넘게 곡괭이질을 했나?






포크레인으로 땅을 파고 흄관을 꺼내기 시작했다. 생각했던 것보다 흄관 하나 제거하는 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흄관을 하나씩 파내는 것을 흐뭇하게 보고 있는데, 옆에서 주무관이 시청에 가보아야겠다고 말했다. 작업 자체가 그리 어렵지 않아서 별다른 문제가 생기지 않을 것이고 자기도 볼 일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주무관에게, 저 놈들이 어떻게 했는지 아느냐, 오늘도 아침에 어떻게 했는지 아느냐, 주무관님이 없을 때 저 놈들이 뭔 짓거리 하면 그 책임을 누가 질 것이냐고 따졌다. 그렇게 말하고는, 내가 농로 양 옆에 죽 심은 나무를 주무관에게 보여주었다.

주무관을 데리고 농로 끝까지 갔다가 공사현장으로 돌아왔는데, 그제서야 주무관이 너무 추워하는 것이 보였다. 추위를 많이 타는지 주무관이 말을 똑바로 못했다. 나보다 한참 어리니 날씨가 춥다고 혈관에 문제가 생긴 것은 아닐 것이고, 얼굴이 좀 얼어서 입을 잘 못 움직하는 것 같았다. 영하 5도에 바람이 많이 부니 그럴 만도 했다. 문제가 생기면 곧바로 공사업자를 제지하고 주무관에게 연락하겠다고 하고는 주무관을 시청으로 보냈다. 다행히 그 이후에 공사현장에서 별다른 문제가 생기지는 않았다.







나는 공사업체에서 우리집 사유지에 흄관을 묻은 줄을 알았지만 여덟 개 전부 사유지에 묻은 줄은 몰랐다. 이래놓고는 아버지를 업무방해로 형사 고발해서 벌금 150만 원을 물게 만들고 1억 1천만 원대 민사 소송을 건 것이었다. 나는 매화나무를 심을 때 흄관을 다시 파낼 것을 고려하여 농로에서 어느 정도 떨어진 지점에 심었는데, 내가 조금만 농로에 가깝게 심었다면 흄관을 파낼 때 매화나무까지 같이 파낼 뻔했다. 그 정도로 공사업체는 대놓고 사유지를 침범했다.

그래도 공사업체가 일은 잘 하는 것 같았다. 우리집 배수관을 교체할 때 보니까, 내가 잘 모르기는 하지만 업체에서 일을 꼼꼼하게 잘하는 것 같기는 했다. 이렇게 멀쩡히 잘할 거면서 우리집에는 왜 그 따위로 했던 것인가? 어쨌든 응분의 대가를 받을 것이다.






업체는 흄관을 파내고 빈 공간을 채우려고 덤프트럭 두 대 분의 흙을 가져왔다. 우량토를 가져온다고 하더니 정말로 좋은 흙을 가져왔다. 내가 흙이 좋다고 하니까 공사업자는 “매립지도 아니고 농지니까 좋은 흙을 가져왔다”고 했다. 업체에서 가져온 흙은 옆집 논에 들이부은 흙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좋은 흙이었다. 물류창고가 들어선다고 하니 이를 투자 기회로 본 옆집은 멀쩡한 논에 흙을 때려부어 밭으로 만들었다. 그런데 어디서 모래 같은 흙을 가져왔는지 풀도 잘 안 자랄 정도로 척박했다. 아마도 값싸게 성토하려고 무기성 오니로 매립한 것 같은데, 농사짓는 척하다가 대지로 형질전환하고 팔아치울 셈이었다면 토질 따위야 알 바가 아니었을 것이다.

오후 3시쯤에 원상복구가 다 끝났다. 나는 뒷마무리를 한 다음 농로와 사유지의 경계를 표시하기 위해 곧바로 나무 말뚝을 박았다. 땅을 한 번 뒤집은 다음이라서 말뚝이 잘 박힐 줄 알았는데, 포크레인으로 땅을 잘 다져서 그런지 생각보다 말뚝이 잘 안 들어갔다. 봄에 땅이 녹으면 그 때 말뚝을 제대로 박기로 하고 일단은 어정쩡하게 꽂아놓았다. 그렇게만 해도 경계 표시를 하는 데는 충분하다. 아침에 포크레인으로 쇠파이프를 밟았다는 것은, 측량 결과에 따라 정상적으로 경계 표시만 해도 중형 포크레인이 농로에 진입하지도 못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제 재물손괴죄를 범하지 않고서는 건설업체가 농로에 진입할 방법은 없다.

어머니는 흄관을 저렇게 파내서 통쾌하다고 하셨다. 그동안 어머니는 업체에서 자신을 시골 아줌마라고 무시했다고 자주 말했다. 이게 어머니 혼자만의 자격지심이 아니라 정황상 정말로 그랬던 것 같다. 그랬었는데, 업체가 돈을 들여 묻은 것을 자기 돈을 들여 다시 파내니 속이 시원하다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어머니의 원한을 풀어준 데서 끝나지 않는다. 우리집은 1억 1천만 원대의 민사소송에 걸려 있다. 원상복구 행정명령을 통해 민사소송이 뒤집힐 것이다. 그러니까 이게 끝이 아니고 사실상 시작인 셈이다.

(2022.01.13.)


댓글 없음:

댓글 쓰기

한강 작가 노벨문학상 수상 예언한 알라딘 독자 구매평 성지순례

졸업하게 해주세요. 교수되게 해주세요. 결혼하게 해주세요. ​ ​ ​ ​ ​ * 링크: [알라딘] 흰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소설 ( 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143220344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