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5/11

대체 역사물



동료 대학원생의 고등학교 동창이 웹소설을 연재하다가 출판사와 계약까지 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삼국지를 배경으로 하는 대체역사물라고 한다. 삼국지 게임을 하다가 원하는 결과가 안 나와서 원하는 결과를 소설로 만들게 되었다고 한다.

생각해보면, 대체역사물로 만들 소재는 많다. 웹소설에서는 현실 세계에서 찌질하게 살던 주인공이 시간을 건너뛰어서 뭘 한다든지 하는 식의 설정을 많이 한다고 한다. 그런 유치한 설정을 넣지 않고도, 주인공이 실제와 다른 선택을 하고 그 이후에 어떤 일들이 벌어질지만 가지고도 충분히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다.

내가 예전에 생각했던 것은, 진시황의 장남인 부소가 자살하지 않는 가능세계에 관한 것이다. 진시황에게 간언을 했다가 미움을 사서 변방으로 쫓겨났던 부소가 이사와 조고가 조작한 가짜 유서의 지시대로 자살하지 않고 몽염과 함께 함양으로 군대를 몰고 갔다면? 이렇게 되면 이야기가 너무 단순해질 것처럼 보인다. 몽염이 “이 반란군 놈의 새끼들, 내가 전차를 몰고 가서 늬놈들 머리통을 다 날려버리겠어”라고 하면서 군대를 몰고 가서 함양을 점령하고, 이사와 조고는 거열형을 당하고, 유방은 그냥 동네 양아치로 살고, 항우는 객기부리다가 죽는, 그런 식의 이야기로 끝날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이야기는 다른 방식으로 재구성될 수도 있다. 진시황의 유서가 조작되지 않았다고 해보자. 진시황은 아버지가 죽으라고 한다고 정말로 죽어버리는 약해빠진 아들에게 황위를 넘기고 싶지 않았고, 호해도 자신이 황제가 되기를 바라고 나름대로의 준비를 해왔다고 한다면, 진시황이 죽으면서 부소에게 자결하라는 유서를 남기는 것도 말이 된다. 장남인 부소가 호해의 앞길에 걸림돌이 될 것이라 우려될 만한 상황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진시황의 유언을 부소에게 전하고 부소는 자결하려고 하는데, 이 때 몽염이 이를 말리고 실제 역사와 달리 부소가 몽염의 말을 듣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몽염이 변방의 군대를 몰고 함양으로 쳐들어가서 쉽게 이야기가 끝날 것 같지만, 그게 그렇지 않다. 진시황 사후에 후계 문제가 쉽게 정리되지 않았다면 호해는 쉽게 사치와 향락에 빠지지 않았을 것이고, 그러면 실제 역사와 달리 맛이 가지 않았을 수 있다. 맛이 안 간 호해가 정상적으로 황제로서 기능하면서 함곡관을 굳게 지킨다면 싸움은 장기전이 될 것이다. 부소와 몽염이 함곡관을 넘지 못하는 사이 그들의 부대에는 보급 문제가 생긴다. 황위 계승을 둘러싸고 내전이 벌어진 틈을 타서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난다면 부소와 몽염은 꼼짝없이 독 안에 든 쥐와 같이 된다. 이걸 부소가 어떻게 해결하느냐를 가지고 이야기를 풀어나갈 수도 있다.

<삼국지연의>에서 등장 인물의 선택을 분기점으로 하면 대체역사물 소재가 장편으로는 몇 십 개, 단편으로는 몇 백 개는 나올 수도 있겠다.

제갈량이 형 제갈근한테 나이 먹고 뭐 하는 거냐고 욕을 뒤지게 먹고 결국 손권 밑으로 들어갔다고 하자. 유비는 어떻게든 도망가서 유장한테 가고, 손권은 조조를 막고 그런 다음 천하삼분이 아니라 이분이 되고, 여기서 제갈량이 어떤 활약을 할지를 가지고도 이야기를 만들 수 있다.

유장이 무능한데 마음씨까지 나쁜 놈이었다고 하자. 신하가 이렇게 건의한다.

“깊숙이 들어와 고립되어있는 유비군은 만 명도 채우지 못하고, 사람들도 귀부하지 않았으며, 들의 곡식에 의존할 뿐 따로 치중(보급)이 없습니다. 파서(巴西)와 재동(梓潼)의 주민들을 모두 부수(涪水) 서쪽으로 철수시키고, 곳간과 노천의 곡물은 모두 태워 없애고, 보루를 높이고 해자를 깊이 파고, 가만히 방어만 하고 적이 싸움을 걸어와도 응하지 않으면, 오래도록 물자를 조달할 수 없어 100일도 지나지 않아 스스로 도주할 것입니다. 이때 습격하면 반드시 사로잡습니다.”

이 말을 들은 유장이 이렇게 말한다. “어, 그럴까?” 이렇게 싸움은 장기전이 되고 유비는 보급을 받지 못하고 발이 묶인다. 이 때 형주에 있는 관우에게서 서찰이 온다. “형님, 조조군이 밀고 내려올 것 같은데 어떡하죠?” 이런 식으로 또 다른 유비의 대모험을 만들 수도 있다.

등애가 검각에서 막히자 우회해서 진령산맥을 넘는다. 7백 리에 걸쳐 고난이도 산악 행군을 마치고 강유관을 마주하는데, 강유관을 지키던 마막이 등애군을 보고 이렇게 생각한다. ‘어? 이 겨울에 산을 넘어왔어? 그러면 해볼 만 하겠는데?’ 그렇게 마막이 강유관을 굳게 지킨다면 등애는 어떻게 될 것인가?

이런 식으로 등장 인물의 선택마다 이야기를 만든다면, 시간과 자원만 충분할 경우 이야기를 찍어낼 수도 있을 것이다.

(2021.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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