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9/12

소논문을 고등학교에서 지도할 수 있을까

   
아르바이트로 간 고등학교에서, 쉬는 시간에 어떤 학생이 나에게 물었다. “그 뭐죠? 사람들이 농구공 주고받는데 고릴라 지나가는 거 모르는 거. 그걸 무슨 현상이라고 하죠?” 투명 고릴라 실험은 선택적 인지의 대표적인 실험 중 하나다. 나는 그 학생이 교양서적을 읽고 궁금한 것이 있어서 물어보는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학생은 학교 수업에서 투명 고릴라 실험을 가지고 발표한다고 했다. 선택적 인지는 인지심리학에서 나오는 것일 텐데 고등학교에서 정규 수업 시간에 그걸 왜 발표하는가? 학생은 답했다. “생물 시간에 발표를 해야 하는데 저는 문과라서 생물학에 대해 아는 것도 없구요, 생각난 게 투명 고릴라 실험이라서 그걸 발표하려구요.”, “발표 주제가 뭔데?”, “자유예요.”, “가이드라인 같은 것은 없어?”, “없어요.”, “선생님이 지도하거나 첨삭하거나 그런 것도 없어?”, “없어요.” 학생이 알아서 뭔가 해오면 교사는 그걸 보고 뭔가를 학생부 같은 데 기록하고 그뿐이라는 것이다. 학생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저는 이런 걸 왜 하는지 모르겠어요.”
  
옆에 있던 학생은 천문학에 대해 발표해야 한다고 했다. 내가 물어보았다. “천문학 책 아는 거 있어?”, “없어요.”, “천문대 갈 수 있는 곳 알아?”, “몰라요.”, “망원경이라도 있어?”, “없어요.” 그 학생도 이렇게 말했다. “저도 이런 걸 왜 하는지 모르겠어요.” 너무 웃겨서 나는 한참 웃었다. 한참 웃고 나서 그 학생에게 말했다. “아니, 그게 무슨 천문학 발표야? 그 정도면 자연철학이라고 해야 하는 거 아니냐?” 사실, 고대 그리스에서도 그렇게 하지는 않았다.
  
학생들은 자기가 왜 발표를 해야 하는지, 무엇을 발표를 해야 하는지 모른다. 다만 학생부에 뭔가를 적어야 한다는 것은 안다. 그런 발표를 시키는 교사도 학생들에게 무엇을 시켜야 할지 모를 것이다. 학생부에 뭔가를 적지 않으면 학생들이 대학 가는 데 문제가 생긴다는 것은 알 것이다.
  
교실 벽에는 <대학 학과별 추천도서>라는 표가 있었다. 학과별 추천도서명과 저자명이 있고 옆에는 난이도가 표시되어 있었다. 신소재공학과 추천도서 중에는 길리스피의 『객관성의 칼날』도 있는데 난이도가 ‘중’으로 되어있다. 같은 과 추천도서인 『파인만의 여섯 가지 물리 이야기』는 난이도가 ‘상’이다. 『객관성의 칼날』은 『파인만의 여섯 가지 물리 이야기』보다 훨씬 어려운 책이다. 이것은 무엇을 보여주는가? 추천도서를 선정한 사람은 자기가 무슨 책을 추천하는지도 모르면서 추천도서 목록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어쨌거나 학생들은 그 목록에 나온 책을 읽고 독후감을 써야 한다. 그렇지만 독후감을 쓴다고 한들 누구 하나 그 학생들의 글을 고쳐주지 않을 것이다.
  
   
  
정책을 만들 때, 의도는 좋았을지도 모른다. 고등학교에서 입시 위주로 교육을 하면 창의성도 안 생기고 인성도 나빠진다는데, 학생들이 스스로 탐구하고 토론하고 고민해서 결과물을 만들면 뭔가 좋아보일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어떻게? 그런 건 없다. 학생들은 어디서부터 무엇을 해야 하는지 전혀 모른다. 그렇다고 지도해줄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다. 교사는 자기 일 하기도 바쁘다. 그렇다고 관련 인력을 채용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잘해봐야, 방과후학교나 특강 형태로 외부 인력의 도움을 받는 것밖에 없는데 그것도 서울이나 몇 개 대도시 정도에서나 가능할까 말까 한 일이고 지방 중소 도시나 시골 같은 데는 그런 인력을 데려올 방법이 없다. 그리고 외부 인력이라고 해도 누가 믿을만한 사람이고 누가 아닌지 알 수 있는 사람도 많지 않을 것이다.
  
영재고 같은 곳이면 모르겠지만, 일반고는 물론이고 웬만한 자립형 사립고에서도 소논문 같은 것과 관련하여 학생들을 제대로 지도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사교육에서 그런 서비스를 제공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질 것인데, 내가 관련 시장 상황을 모르니 함부로 말하기는 어렵다. 다만, 확실한 것은, 이런 쪽 관련 사교육에서 정말 괜찮은 서비스를 제공하는 일이 벌어진다면, 그 때의 격차는 수능 문제 몇 개 맞고 틀리고의 차이보다 훨씬 커질 것이라는 점이다. 수능 사교육은 표준화된 대량 생산이 가능하지만 이런 쪽은 그렇지 않기 때문에 웬만큼 시간이 지난다고 해도 서비스 공급량이 충분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상황을 상상해보자. 괜찮은 연구자인데 불운하여 교수는 안 되고 시간강사를 전전하는 사람들이 꽤 있다. 요즈음 추세대로라면 멀지 않은 미래에 돈 있는 부모 중에 불운한 연구자한테 자식 교육을 맡기는 사람이 나타날지도 모르겠다. 입시 과목은 학원이나 다른 강사한테 맡기고 불운한 연구자한테는 보모 역할 겸 해서 아이들하고 놀아주라고 하는 것이다. 어려서부터 그렇게 자란 아이들 중에는 중고등학생 때부터 고전이나 논문을 읽는 아이들이 나타날 것이다. 옛날 유럽 귀족들도 그랬으니까 그렇게 놀라운 일은 아니다. 그들이 그렇게 할 때, 어떤 집에서는 이지성 책을 읽은 부모가 자식 손 잡고 교보문고에 가서 읽을 수도 없는 고전을 사와서는 공책에 받아쓰라고 시킬 것이다.
  
돈 있는 집이나 돈 없는 집이나 이지성 책 읽고 고전 필사하는 것보다는 둘 중 한 쪽이라도 좋은 교육을 받는 것이 좋은 일이기는 하다. 그렇지만 이게 무엇을 함축하는 것인지는 생각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2019.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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