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기흥, 『광우병 논쟁』 (해나무, 2009). ]
1. 양들의 침묵
2. 스크래피, 스페인 왕실의 음모?
3. 유럽에 확산된 스크래피
4. 수의학의 발전과 스크래피 연구
5. 스크래피는 전염되는가?
1. 양들의 침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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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0년대 영국에서 양들이 균형을 잃고 쓰러지기 시작.
예민해지고 공격적으로 변했으며 자신의 몸을 기둥이나 벽에 긁어서 양털이 모두 떨어져나가는 현상도 발생.
영국 문헌상 이 질병에 대한 기록은 1750년대 링컨셔(Lincolnshire)주 농부들이 이 질병 탓에 큰 손해를 입었다는 탄원서에서 처음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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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2년 토머스 코머는 이 새로운 질병을 양 구루병(Rickets)이라 부름.
1810년대에는 몸을 기둥이나 나무에 비벼댄다는 뜻으로 ‘러버스’(Rubbers)라고 불림.
1853년에는 ‘스크래치’(scratch) 또는 ‘스크래피’(scrapie)라고 불림
18세기부터 19세기까지 약 200년 동안 이 질병은 영국의 목양 산업에 큰 타격을 주면서 확산되었지만 학자들이나 저술가들은 이 질병이 어떤 종류의 병인지, 그 원인이 무엇인지 알아내지 못했음.
2. 스크래피, 스페인 왕실의 음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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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는 이른바 ‘계몽의 시대’
지식인들은 과학적 진보를 통해 인간이 자연을 지배할 수 있다고 믿음.
농업 생산력은 빠르게 증가.
영국은 특히 목양 분야에 주목
더 많은 경제적 가치를 얻기 위해 양의 품종 개량을 시도함.
그 중 가장 각광받는 방법은 동종 번식(in-breeding)
이를 통해 1710년대 28파운드이던 양의 평균 무게가 80파운드까지 증가.
23-26
메리노 양은 스페인 왕실의 특별 명령 없이는 외부로 유출될 수 없었음.
영국과 스페인은 적국이자 경쟁국가
스페인 국력이 약해지면서 메리노에 대한 규제가 서서히 완화됨.
스페인의 메리노양이 영국에 들어오자 영국인들은 동종 번식 방법을 통해 메리노양의 숫자를 늘림.
그러나 메리노양도 스크래피로 죽어나가자 영국에는 스페인이 병든 양을 보내 영국 목양 산업을 방해하려 한다는 루머가 퍼짐.
당시 스페인은 메리노양을 유럽 전역에 수출하였고 그에 따라 유럽에 스크래피가 확산되었기 때문.
프랑스도 예외가 아니어서, 심각한 경제적 위협으로 작용
3. 유럽에 확산된 스크래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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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부터 본격적으로 스크래피로 의심되는 질병이 스페인, 영국, 프랑스, 독일에서 발생.
학자들은 이 질병을 스페인에서 수입된 메리노양 문제로 국한시키려는 경향이 있었으나 사실 질병의 발생은 모두 동종 교배법이 퍼져나가면서 시작됐다.
4. 수의학의 발전과 스크래피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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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래피는 계몽주의의 산물이었고 수의학에서도 중요한 연구 대상 중 하나.
1898년 프랑스에서는 스크래피에 걸린 양의 조직을 검사하여 척추 일부 신경에서 구멍난 듯 보이는 계수기 사이 액포를 발견
20세기 초 영국 수의사들은 스크래피가 다른 질병들보다 잠복기가 매우 길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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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에서는 중요한 스크래피 연구소 두 곳이 설립되어 본격적 연구가 이루어지기 시작.
1921년 스코틀랜드의 지주들과 농부들이 사재를 털어 동물질병연구연합(Animal Disease Reserach Association)을 설립
1926년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에 모어던연구소가 신설.
그밖에 1937년 영국 정부 산하에서 동물질병연구소가 탄생하는데, 훗날 스크래피와 광우병 연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됨.
5. 스크래피는 전염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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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툴루즈 대학에서는 스크래피 걸린 양의 뇌를 건강한 양에게 주사하는 실험을 통해 스크래피의 전염성을 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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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후 2차 대전의 발발로 여러 연구들은 거의 중단 상태
전문가들은 전쟁관련 분야로 파견되었으므로 소수의 연구자들만이 연구를 지속.
데이비드 윌슨(David Wilson)은 스크래피를 일으키는 병원체가 매우 작은 크기의 병원체라는 사실을 알아냈고, 통념과는 달리 고온 포르말린 페놀처리 등에서도 살아남는 것을 발견.
놀라운 것은 이 병원체가 자외선도 견뎌냈다는 것.
당시에는 이 사실들을 극히 소수의 동료들만 알고 있었을 뿐 과학 저널이나 다른 경로를 통해 발표되지 못했음.
하지만 1960년대 영국에서 스크래피 연구가 본격적으로 시작하면서 윌슨의 연구는 다시 알려졌고 후대 연구의 토대가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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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동물질병연구소 연구원이었던 챈들러는 양이나 염소 대신 실험쥐를 사용한 스크래피 실험에 성공하여 8개월에서 3년까지 걸리는 잠복기를 100일로 단축시킴.
이후 실험쥐는 유전학 연구의 필수조건이 되었고 스크래피 연구의 가속화에도 기여.
(2019.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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