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8/01

속죄 논문

     

제본된 석사 논문을 들고 중세철학 선생님을 찾아갔다. 선생님은 일단 연구실로 들어오라고 하셨다. 연구실 의자에 앉아 나는 수줍게 말했다. “예전에 지은 죄가 커서 속죄하려고 왔습니다.”
  
나는 석사 과정 1학기에 발제를 펑크 낸 적이 있다. 지금도 나는 영어를 잘 못하는데 그 때는 영어를 처참하게 못해서 대학원 수업을 제대로 따라가지 못하고 있었다. 기말로 갈수록 수업은 한 주에 끝낼 것을 다음 시간에 끝내는 식으로 진행되는 경향이 있는데(8주차 진도를 8주차 수업 후반부와 9주차 수업 전반부에 하는 식), 나는 그 주에 해야 하는 발제를 다음 주에 하는 줄 알고 발제를 하지 않았다. 그 날 내가 발제를 했어야 한다는 사실을 수업 시작 네 시간 전에 알았다.
  
나는 수업 시간 두 시간 전에 선생님 연구실을 찾아가 사정을 말했다. 막장 상황인데도 선생님은 분노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나를 진정시키셨다. “너무 놀라지 마세요. 가끔 있는 일입니다. 그래도 지금이라도 와서 다행이네요.” 다행히 한 주 수업을 통째로 날리지 않고 절반만 날렸다. 그 다음 주에는 발제를 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인데, 다른 학교에도 발제 안 한 사람이 몇 년에 한 명씩 나온다고 한다. 그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나. “몰라. 발제하는 날 수업에 안 나왔어. 그 학기에 자퇴했다고 하던데.” 다들 그랬다고 한다. 그런 대형 사고를 치고도 자퇴 안 하고 석사 과정까지 마친 것은 상당히 이례적인 경우다.
  
발제를 안 한 날, 나는 도망가지 않고 수업 시간에 앉아있었다. 돌을 던지면 돌을 맞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너무 부끄러워서 건물에서 뛰어내리고 싶었는데, 그렇다고 진짜 건물에서 뛰어내리면 발제 빼먹고 부끄러워서 건물에서 뛰어내린 사람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대학원에 도시 전설처럼 대대손손 전승될 것 같아서 그러지 못했다. 게다가 대학원이 3층이라 뛰어내려도 안 죽고 살 것 같았다.
  
석사 첫 학기에 죄를 짓고 나는 생각했다. ‘내가 지은 죄를 속죄하는 길은 좋은 석사 논문을 쓰는 것뿐이다.’ 그러고는 한참동안 논문을 못 썼다. 남들보다 1년 반 정도 더 걸려서야 간신히 석사 논문을 썼다.
  
연구실에서 선생님은 여러 가지를 물으셨다. 석사 논문 쓰는 데 왜 그렇게 시간이 오래 걸렸는지, 왜 그런 주제로 썼는지, 논문 지도를 어떻게 받았는지, 협동과정은 철학과와 어떻게 다른지, 앞으로 무슨 연구를 할 것인지 등. 내 석사 논문을 이리저리 살펴보시더니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거 쓰는데 고생 많이 했겠는데요?”
  
“원래는 석사 논문을 잘 써서 속죄를 할 생각이었는데 이 정도로는 속죄가 안 될 것 같고 다음에 좋은 논문을 써서 마저 속죄하겠습니다.” 내 말에 선생님은 씩 웃으셨다. “그래요, 고생했어요. 찾아와줘서 고맙습니다.”
  
  
(2017.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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