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 토요일에 고등학교에서 1학년 학생들을 대상으로 아르바이트를 했다. 토요일에 3시간씩 세 번 하기로 했다. 올해는 쿤의 『과학 혁명의 구조』를 소개하기로 했는데 작년보다는 반응이 안 좋았다. 일반적인 고등학생 수준에서는 과학철학보다는 플라톤 초・중기 대화편이 더 적합한 것 같다. 과학고 같은 데서 『과학 혁명의 구조』를 하면 좋을 것 같은데 그런 제안이 들어올지는 모르겠다.
『과학 혁명의 구조』를 다루기 전에 쿤의 일생을 소개했다. 나는 물리학과에 들어간 쿤이 어떻게 과학사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지 대강 이렇게 이야기했다.
“코넌트 총장은 문과생들한테 자연과학을 가르치는 프로그램을 개발하기로 했어요. 문과생들도 자연과학적인 사고를 배워야 한다는 거죠. 그런데 일반물리나 일반화학 같은 것을 그냥 가르칠 수는 없잖아요. 하버드 온 애들이 일반물리를 못 배울 리는 없겠지만, 과학적 사고를 배우는 게 아니라 문제 푸는 것만 배우고 끝날 것 같단 말이에요.
그래서 코넌트 총장은 어떻게 하느냐? 과학사 위주로 과학을 가르치기로 합니다. 글 잘 쓰는 사람한테 이 일을 맡기는 것이 좋겠다 싶어서 쿤한테 맡깁니다. 쿤이 학부 때 하버드대 대학 신문사 편집장이었어요. 대학에 가면 학교마다 대학 신문이 있어요. 여러분도 대학 가면 알겠지만 대학에서 대학 신문이라고 하는 건 아무도 안 읽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글 잘 쓰는 애들은 대학 신문사에 잘 안 가는 것 같아요. 하버드대는 그렇지 않았다고 합니다. 하버드대 대학 신문은 학교뿐만 아니라 지역 사회의 여론에도 영향을 주는 매체였고, 그런 하버드대 대학 신문에서 쿤이 편집장이었다는 거지요. 쿤은 이과생인데도 그 정도로 글을 잘 썼다는 겁니다.
나도 그랬지만, 보통은 수학을 못 하는 애들이 인문대를 갑니다. 그렇게 인문대 간 애들이 글도 못 써요. 이런 사람들을 뭐라고 하는지 아세요? ‘정상인’이라고 합니다. 그게 정상이죠. 어떻게 쿤이 정상입니까? 요즈음에 통섭이니 뭐니 하는데, 아마도 쿤 같은 사람들이 전형적인 통섭형 인간일 겁니다. 문과 조금 이과 조금 배운다고 그렇게 되는 게 아니에요. ‘아, 나는 언어 영역이 4등급 나오는데 수리 영역도 4등급 나오니까 통섭형 인간이다’, 이건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방송에서 통섭형 인간이니 뭐니 하는 게 나와도 들을 필요가 없습니다. 물론 쿤 같은 사람도 있겠죠. 그런데 그런 사람이 얼마나 됩니까?
그러면 통섭형 인간이 될 것도 아닌데, 교양을 왜 배워야 하느냐? 교양은 성과를 내려고 배우는 것이 아니라 재미로 배우는 거예요. 교양을 배워서 어디에 쓰느냐. 교양을 배워서 이야깃거리도 많아지고 대화가 풍성하고 삶의 질도 높아지고 어디 가서 아는 척도 하고 그러면 좋잖아요. 애인한테도 프로듀스 101 같은 거나 이야기하지 말고 고상하고 재미있는 이야기 하면 좋잖아요. 이것저것 많이 배우면 더 좋은 성과를 낸다? 그런 사람은 매우 적습니다. 하지만 재미있게 살려고 교양을 쌓는다면 재미있게 사는데 도움이 됩니다. 그러니까 통섭 같은 소리에 현혹되면 안 돼요.”
나는 100분 동안 일하고 20분 쉬었다가 다시 100분 동안 일하기로 되어 있었다. 쉬는 시간에는 교무실에서 쉬었다. 교무실 벽 게시판에 포스터 두 장이 붙어있었다. 한 장은 내가 하는 일을 홍보하는 것이고 그 옆에 있는 포스터는 어느 대학 교수가 강연하러 온다는 것이었다. 놀랍게도, 그 교수는 최재천 교수였고, 통섭형 인간을 주제로 강연을 한다는 내용이었다. 담당 선생님에게 물었다. “최재천 교수가 고등학교에서도 강연을 하네요?”, “네, 최재천 교수님이 이 고등학교 출신이라서요 매년 오셔서 강연을 해주세요.” 간신히 지각을 면해서 학교에 도착했을 때 교무실에 들어가지 않고 곧바로 교실에 들어갔었다. 조금 일찍 와서 교실에 들어가기 전에 교무실부터 들어왔어야 했는데.
(2017.0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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