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외고에서 한 인지과학 캠프에서 강사를 했다. 내가 맡은 건 인지과학 서론-방법론과 철학이었다. 인지과학 방법론 내용 중에는 인간이 주어진 정보를 바탕으로 의사결정을 할 때 직관적으로 어림잡아 추정하는 방법을 쓰는데 그 방법이 왜 믿을만하지 못한지 소개하는 부분이 있었다.
우선 사람 이름 스물네 개가 적힌 표를 화면에 띄우고 10초 동안 외우도록 한다. 10초 후 화면에서 표를 치운 후 학생들에게 묻는다. “남자 이름이 많았나요, 여자 이름이 많았나요?” 대부분은 여자 이름이 많았다고 답한다. 실제로는 남자 이름이 열네 개, 여자 이름이 열한 개였다. 실제와 달리 여자 이름이 많다고 응답한 이유는 남자 이름은 낯선 정보이고 여자 이름이 익숙한 정보(유명 연예인)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름을 짚으면서 누구인지 설명했다.
“자, 맨 처음에 ‘구태훈’ 있죠? 누구죠? (침묵) 아무도 모르죠? 이 분은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예요.”
사실, 그 표에 내가 이름을 넣은 건 아니라서 원작자가 생각한 ‘구태훈’이 구태훈 교수인지 다른 사람인지는 모른다. 어쨌든 그건 중요하지 않다. 명단에 나온 남자가 여자보다 안 유명하면 되고 아이들이 재미있어하면 된다. 나는 내가 아는 대로 말했다.
“여기 ‘강소라’ 있고 ‘김연아’ 있죠. 이 둘은 다 알 거고 옆에 ‘김진만’ 누구죠? MBC PD죠. 그 옆에 ‘김학철’은요? KBS 사극에 자주 나오는 아저씨 있어요.”
내가 명단에 나온 남자를 (내 마음대로) 설명하자 아이들이 조금씩 웃었다. ‘신민아’, ‘손연재’를 지나서 나는 ‘이동준’을 가리켰다.
“‘이동준’ 누구죠? 몰라요? 불멸의 역작 <클레멘타인>의 주연배우이자 제작자죠.”
대부분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게 누구지?’ 하는 표정을 짓는데 몇몇 학생들이 배를 잡고 웃기 시작했다. 웃음인지 울음인지 분간이 안 가는 기괴한 소리를 내며 주변 친구들한테 말을 하기 시작했다. “<클레멘타인> 몰라? 네이버 평점 1위, ‘이 영화를 보고 암이 나았습니다’ 몰라? ‘이 영화를 보고 암이 나았어요. 암세포가 암이 걸려 암이 나았습니다’ 몰라?”
교실에 있던 학생들이 모두 웃기 시작했다. 모두들 배를 잡으며 “아, 클레멘타인! 클레멘타인!”을 연호했고 일부는 “아빠 일어나!”를 외쳤다.
다른 강사들 이야기를 들으니, 심신 문제 다룰 때 도입부에 영화 <매트릭스> 이야기를 하는데 학생들 중 <매트릭스>를 본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했다. 1999년에 태어난 학생들은 1999년에 개봉한 <매트릭스>를 몰랐다. 그런데 <매트릭스>를 모르는 학생들도 2004년에 나온 <클레멘타인>은 알고 있었다.
강의가 끝나고 교실을 나오려는데 한 학생이 내 앞에 왔다. “선생님은 <클레멘타인>을 어떻게 아세요?” 나는 대답했다. “대학교 1학년 때 <클레멘타인>이 나왔죠. 내 컴퓨터 하드에는 지금도 <클레멘타인> 파일이 있어요.”
* 뱀발(1): 내가 가수를 잘 몰라서 강의 때 대충 넘어갔는데, 신재평과 이장원은 <페퍼톤스>의 멤버이고 구태훈과 김진만은 <자우림>의 멤버라고 한다. 이동준은 이적의 본명이라고 한다. 강의 자료를 만든 사람이 표에 이동준을 넣을 때 <클레멘타인>을 염두에 두지 않았던 모양이다.
* 뱀발(2): <클레멘타인>을 재개봉하면 극장에서 볼 생각이다.
(2016.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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