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대학에서 스티브 잡스 같은 인재를 못 길러낸다고 기업들이 투정한다는 기사가 경제신문에 종종 나온다. 그래놓고 기업에서는 신입사원들을 병영 캠프로 보내고 유격훈련을 시킨다.
“지난 30일 경기도 천안 국민은행 연수원에서 연수중인 김씨를 찾았다. 김씨는 전날 1박2일 100km 행군을 마치고 피곤했을 텐데도 아침 일찍 일어나 화장을 하고 기자를 맞이했다. 그는 중학교 때 전국 태권도 대회에서 은메달을 딸 정도로 강한 체력을 지녀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며 웃겼다.”
“지난해 10월 엘지 계열사에 입사한 ㄱ(28)씨는 신입사원 연수 때 회사 응원가인 ‘엘지 메들리’를 부르며 팔을 양쪽으로 활짝 펼치거나 주먹을 치켜들고, 제자리에서 팔짝 뛰는 율동을 4분13초 안에 마치는 연습을 했다. 연수 교육 담당자들은 가사와 율동이 조금이라도 틀리거나 목소리가 작으면 다시 ‘시험’을 보도록 했다.”
“2013년 동부그룹 계열사에 입사한 ㄴ(27)씨는 군대식 체험 훈련 형식으로 이뤄진 신입사원 연수를 받고 4개월 뒤 퇴사한 경우다. 당시 신입사원 연수 과정에서 ㄴ씨의 동료 연수생 중 일부는 기구에 오르는 체력활동을 하다가 갈비뼈가 부러지는 등 부상을 입기도 했다. 또 창업자의 자살 시도 등 일대기를 외워서 시험을 보게 하는 전근대적 교육도 이뤄졌다.”
유격훈련을 시키면 스티브 잡스 같은 인재가 되나? 스티브 잡스가 한국 기업에 입사했다면 회사 응원가 부르며 율동하다가 자기 성질을 못 이겨서 퇴사했을 것이다. 요새는 신문에서 허구헌날 한국 대학에서 왜 스티브 잡스를 못 키우냐고 안달복달하는데, 기업 문화가 이렇게 후진데 대학에서 스티브 잡스를 키우면 뭐 하나?(심지어 미국 대학이 스티브 잡스를 키운 것도 아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례는 단순히 한국의 기업 문화가 후지다는 것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 예전에 경제학과 수업에서 어떤 선생님이 경제성장과 관련하여 크루그먼의 논문을 소개한 적이 있다. 선생님은 “동아시아의 경제성장은 영감(inspiration)이 아니라 땀(perspiration)에서 나왔다”는 크루그먼의 말을 인용하면서 나라별 성장회계 자료를 제시했는데, 그 자료가 보여주는 것은 2차 대전 이후 동아시아의 경제 성장은 노동력을 쥐어짜서 나온 결과이지 기적이 아니라는 점이다. 동아시아 국가들 중에서도 특히나 노동력을 쥐어짠 것으로 나오는 곳이 한국이다.
노동력을 갈아넣기 위해 필요한 것은 창의성이나 합리성 같은 것이 아니라 몰개성과 맹목적인 복종심일 것이다. 신입사원들에게 회사에 들어오자마자 “앉아, 일어나, 뛰어, 짖어” 하는 것을 시키는 것은 노동력을 갈아넣어야 할 때 주저 없이 갈아넣을 수 있도록 하는 일종의 준비운동 비슷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나는 취업도 해본 적이 없고 취업 준비도 해본 적이 없어서 회사들 사정은 모르지만, 만일 내 추측이 옳다면, 기업의 신입사원 연수에서 일어나는 이상한 일은 옛 시대의 악습의 흔적이 아니라 한국 자본주의가 굴러가는 현재 모습을 압축적이고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 링크(1): [한국경제신문] 미스유니버시티 출신의 은행원... “내 사전에 ‘문송합니다’란 없다”
( http://plus.hankyung.com/apps/newsinside.view?aid=201512319703A )
* 링크(2): [한겨레] 갈비뼈 부러지도록 ‘애사심 강제 주입중’입니다
( 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725040.html )
(2016.0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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