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2/28

1차 대전 참전과 여성의 참정권



EBS 사회과목을 가르치는 강사가 강의 도중 “1차 대전에서 전후방 구분 없이 여성들도 싸웠기 때문에 1차 대전이 끝난 후 여성의 지위가 올라가고 참정권을 얻게 되었다”고 말했다고 한다. 여기까지만 들으면 그런가보다 하겠는데, 뒤이어 “여권 신장, 여권 신장이라고 하는 것은 말만 해서는 안 된다”며 “항상 모든 권리에는 의무가 수반된다”고 말했다고 한다. 모든 권리에는 의무가 수반된다니, 이런 발상은 어디에서 왔을까? 사범대에서 그렇게 가르치지는 않을 것 같은데, 도대체 어디서 그런 말을 들었을까?
  
  



  
  

동성애자들은 자기들의 권리를 요구하며 퀴어 축제 같은 것을 한다. 동성애자들은 그동안 이성애자들과 동일한 의무를 수행했는데 동성애자로서 권리를 얻기 위해 무슨 의무를 더 해야 하는가? 아이들은 무슨 의무를 했길래 권리를 보장받아야 하는가? 요즈음 동물권에 관한 논의가 활발해지고 있는데, 동물들이 무슨 의무를 할 수 있기에 인간들이 동물권을 보장해야 하는가? 농경 사회에서 소는 죽을 때까지 일만 하다 고기가 되었고, 현대 사회의 애완견은 평생 놀고 먹지만 온갖 호사를 다 누리는데 이건 어떻게 된 일인가?

권리는 의무에 상응하여 누군가 알아서 선사하는 것도 아니고, 행한 의무와 등가교환으로 손에 넣는 것도 아니다. 인류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여성들이 일 안 하고 처놀아서 남성보다 대접을 못 받은 게 아니고, 흑인 노예들이 목화 농장에서 목화를 덜 따서 사람 대접 못 받은 것도 아니다. 누군가에게 어떤 권리가 있는지와 그러한 권리를 보장받기 위한 과정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쉽게 구분될 수 있다. 여성이 아무 일도 안 하고 쳐놀아서 여권이 없었던 것이 아니고, 여권은 원래 있었고 보장해야 마땅했으나 여성들이 이를 쟁취할 힘이 없다가 1차 대전 이후로 목소리가 커지면서 여권이 신장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내가 정치철학은 잘 몰라서 권리와 의무에 대한 전문적인 논의는 잘 모르겠으나, 얼핏 생각해봐도 이 둘이 서로 결부되지 않음은 쉽게 알 수 있다. 의무 중에는 ‘납세의 의무’가 있다. 납세의 의무를 수행하면 도대체 어떤 권리를 얻는가? 그냥 세금을 낼 뿐이며, 세금을 안 내면 압류가 들어오거나 감옥에 가는 것이다. ‘국방의 의무’도 마찬가지다. 국방의 의무를 수행한 사람과 수행하지 않은 사람 사이에 어떤 권리 차별이 있는가? 없다. 군 가산점이 있다고 한들 그건 권리가 아니다. 반대로, ‘선거권’이나 ‘피-선거권’ 같은 권리를 얻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 세금을 일정 액수 이상 내는가? 대한민국 국적의 성인이고 수감자만 아니면 가질 수 있다. 나는 사회과목 강사라는 사람이 “권리에는 의무가 따른다”고 학생들에게 가르친다는 것 자체가 이해가 안 간다.

대개의 경우, 권리와 의무를 결부시키는 건 애초부터 권리를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는데 마땅한 말이 없으니까 의무를 덧붙이는 것이다. 가령, 악덕 사장이 “권리를 누리려면 그에 상응하는 의무를 다해야 한다”고 말한다면, 그건 직원에게 아무런 이유 없이 복리후생을 제공하지 않으면 없어 보이니까, 뭔가 말이 되는 것처럼 보이려고 개소리를 하는 것이다.

여성의 사회 활동이 더 활발해지도록 여권이 신장되어야 하는 마당에, 여권 신장을 주장하기 위해 여성들이 사회에 진출해야 한다고 말한다니, 도대체 사회과목 강사는 어떤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인가? 면접장에서 면접관이 여성 구직자에게 남자 친구가 있냐 없냐를 묻는 판에, 여권 신장을 주장하기 전에 여성들이 의무를 다해야 한다니 도대체 이건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

(2015.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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