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맡은 학부 <언어철학> 수업에서 프레게부터 시작하여 러셀, 스트로슨과 도넬란, 크립키과 퍼트남, 카플란을 거쳐서 페리와 에반스까지 왔다. 중간고사 이후에도 학생들은 잘 출석하고 있다. 중간고사 시험지에 백지를 낸 학생들도 대부분 출석하고 있다. 내가 학생들에게 “어차피 인생은 상대평가”라고 해서 그랬는지, 아니면 상대평가를 일종의 치킨게임으로 설정하고 “먼저 핸들 꺾는 사람이 지는 거다”라고 해서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내 수업을 듣는 학생들 중 대부분은 철학과 아예 상관없는 삶을 살 것이다. 성도들에게 복음을 더 잘 전하기 위해 신학박사 학위를 받고 다시 철학과 학부에 학사편입한 목사님에게도 내 수업이 직접적인 도움은 되지 않을 것이다. 물론, 삶과 분리되지 않는 철학 같은 소리를 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말에 반발할지도 모르겠다. 그런 사람을 만나면 이렇게 물어보자. “당신은 철학과 교수도 아닌데 지시사의 뜻과 지시체가 당신의 삶과 무슨 상관이 있나요?” 약간이라도 양심이나 상식이 있다면 입을 다물 것이다. “이래서 분석철학이 문제다”라고 하면 이미 맛이 많이 안 좋은 것이니 “네, 그러십시오”라고 하고 재빨리 자리에서 벗어나는 것이 좋겠다.
철학 전공 수업의 내용이 해당 수업을 듣는 학생에게 직접적인 도움이 되는 바가 없더라도, 간접적으로 도움이 되는 경우는 없을까? 널리 퍼진 견해 중 하나는 철학이 비판적 사고에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무슨 수로? 다른 학문에서는 비판적 사고를 안 하나?
이에 대한 뻔한 답변은 철학은 당연하게 생각하던 것을 의심하고 질문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건 교양 수업 같은 데서 수업 준비 안 하고 대충 수업하는 사람들이 학생들에게 플라톤 초기 대화편이나 대충 읽히고, 질문이나 우라지게 많이 해서 상대방이 답변 못하게 하는 것이 비판적 사고인 양 호도하고, 토론이나 대충 많이 시켜서 헛바람이나 잔뜩 불어넣을 때나 할 법한 소리다. 플라톤의 중기 대화편인 『소피스테스』만 읽혀도 그런 소리는 쏙 들어간다. 『소피스테스』에서는 소피스트가 어떤 사람들인지 가능한 한 경우를 싹 따져가면서 대화편이 시작된다. 여기서 학생들이 무엇을 질문하고 무엇을 의심할 것인가?
내가 하는 수업만 해도 그렇다. 내가 언어철학을 잘 아는 게 아니라서 수업 준비를 하면서 당연히 여기는 것에 의문을 품게 되는 게 아니고 ‘내가 수업 준비를 잘 하는 게 맞나?’ 하며 당연히 해야 하는 것에 대한 의문을 품는다. 그 외의 다른 생각은 들지 않는다. 어찌어찌 수업을 준비해서 강의실에 갔다고 치자. 수업을 시작하자마자 학생들이 동요하는 게 보인다.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다. 아마도 다들 ‘이게 또 무슨 소리인가?’ 하고 생각할 것이다. 그래도 나는 동요하지 않고 수업을 계속한다. 대충 말이 되게 설명했다 싶을 때 학생들을 보면, 일부는 정신이 살짝 나가 있고 일부는 약간 압도된 것처럼 보인다. 내가 수업을 잘 해서 압도된 것이 아니다. 분명히 프레게부터 다들 그럴 법하고 강력해 보이는 이야기를 하는 것 같은데, 거기서 어떻게 또 귀신같이 취약점을 찾아내는 사람이 있고, 또 그에 대한 대안을 내놓는 사람이 있고, 그렇게 이론이 더 세진 것 같은데 거기서 또 취약점을 찾아내는 사람이 있고, 그런 사람이 매주 나온다. 학생들은 그런 철학자들에게 압도된 것이다. 수업에 소개된 최상위권 철학자들은 비판적 사고를 하고 창의적이라고 치자. 수업 내용 자체가 하나도 안 당연한 건데, 내 수업을 듣는 학생들이 무슨 수로 당연해 보이는 것에 의문을 품는 창의성 전사가 되겠나?
이렇게까지 설명하더라도, 그래도 당연해 보이는 것이 의문을 품는 것은 좋은 태도가 아니냐고 묻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여기에 대한 나의 답변은, 제 정신이 박힌 사람이 당연해 보이는 것에 왜 질문을 하느냐는 것이다. 당연하지 않으니까 의문이 생기는 것이다. 당연한 건 당연하게 여기면 된다. 당연한 것을 의심해 봐야 나오는 것은 망상밖에 없다. 데카르트의 방법적 회의를 언급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겠으나, 그러한 종류의 회의는 애초에 진정한 의심이 아니라 자기기만에 불과하다는 찰스 퍼스의 말이 그에 대한 좋은 답변이 될 것이다. 데카르트가 정말로 그렇게 의심했다면 그건 일종의 공황장애 비슷한 것일 텐데 그럴 리는 없고, 논증을 위한 일종의 장치로 보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물론, 분별없는 의심이나 질문이 도움이 되는 때도 있다. 일종의 태업 비슷한 것 할 때가 그렇다. 10년 전쯤에 학부 후배한테 들은 이야기가 있다. 당시 문과대학 학생회장 선거할 때, 한 선본은 학생운동을 하는지 학생운동에 친화적인지 하여간 그런 쪽이었고, 다른 선본은 반-운동권 쪽이었다고 한다. 그 때 철학과 학생들이 전자 쪽 선본에서 찬조 연설 같은 것을 했는데 이 때 “우리가 동의할 수 있는 공동체” 같은 소리를 하면서 돌아다녀서 나름대로 반향이 있었다고 한다. 그 이야기를 나에게 전달한 후배는 “철학과 애들이 자기네가 무슨 말을 하는 줄 모르고 돌아다닌 것 같은데 하여간 선거에 도움이 되었다”고 말했다. 자기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았든 몰랐든 반동들의 준동을 방해했다니 좋은 일이기는 한데, 비슷한 방식으로 멀쩡한 일을 방해하는 경우는 훨씬 더 많았을 테니 마냥 좋다고 할 수는 없다.
학부생을 대상으로 한 철학 교육의 효용을 이야기할 때, 초점을 비판적 사고니 의심이니 질문이니 하는 것에 맞추면 안 된다. 사실에 부합하지도 않고 방향 자체도 딱히 바람직하지 않다. 내가 보기에 사회적으로 권장될 미덕과 철학 교육의 효용이 부합할 지점은 두 가지다.
하나는, 관용의 원리이다. 비판할 때 비판하더라도 일단은 해당 입장을 최대한 합리적인 것으로 이해하자는 것이 관용의 원리이다. 수업에서 소개한 철학자들의 작업을 보자. 철학자마다 논증 방식이 약간씩 다를 수는 있지만 선행 연구에 대한 기본적인 자세는 비슷하다. 일단, 선행 연구를 최대한 정확히 이해하려고 하고, 다른 사람들도 핵심을 잘 파악할 수 있도록 정리한다. 정리라는 것이 단순 요약이 아니라 숨은 전제를 찾고 논증을 재구성해서 기존 주장이 어떤 구조로 되어 있는지 최대한 잘 파악할 수 있게 한다. 그렇게 해서 문제점이 드러나게 한 다음 비판하기 시작한다.
남을 어떻게든 이겨 먹으려고 하는 호승심 가득한 사람들은 남들이 멀쩡하게 이야기를 해도 근본적인 질문을 한다면서 아무 문제도 안 될 것을 가지고 이상한 질문이나 해서 업무를 방해한다. 그래 놓고 철학 운운하면 답이 안 나온다. 그런 사람들을 고용주들이 좋아하겠나? 나 같아도 안 뽑겠다. 상대방이 개떡같이 이야기를 해도 최대한 잘 이해하려고 하는 노력이 선행되는 것이 오히려 철학하는 태도에 가깝다.
다른 하나는, 해결되지 않은 문제를 담담히 마주할 수 있는 태도이다. 완전히 해결된 철학적인 문제라는 것이 얼마나 되겠느냐만, 그렇다고 해서 철학에 발전에 전혀 없었느냐고 한다면 그것도 아니다. 언어철학 수업만 봐도, 분명히 무언가 더 좋아지고 정교해지는 게 학부생 눈에도 보인다. 그런데 완전히 해결된 것도 없고 완전히 해결될 것 같지도 않다. 누군가가 그런 상황을 담담히 받아들일 수 있다면, 그건 일종의 낙관적인 태도를 가졌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두 가지 태도가 먹고사는 데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으나, 이 정도가 그나마 말이 되는 철학 교육의 효용이 아닐까 싶다.
(2024.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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