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새 대학에서 학생회 선거를 하나 보다. 버스정류장에서 내려서 강의실로 걸어가는 데 학생들이 길거리에서 선거운동을 한다. 어떤 선본의 선본곡은 싸이의 <챔피언>이다. 2024년 기준으로 옛날 노래인데 학생들이 그 음악에 맞추어서 율동한다. 율동 연습은 많이 안 한 것 같다. 보고 있으니 괜히 웃음이 난다. ‘하여간 저 학생들은 젊어서 좋겠다. 나도 저 노래가 나올 때는 젊었는데’ 하면서 지나가는데 다른 곳에서 다른 선본이 구호 같은 것을 큰 소리로 외친다. 그런데 약간 이상하다. 선본 이름이 <바로>란다. 바로? 이 학교는 신학대인데, 선본 이름이 <바로>라고?
웃음을 참고 강의실로 들어갔다. 요새는 수업 전에 수업과 아무 상관 없는 이야기를 한다. 어차피 수업 때 모두가 고통받기 때문에 요새는 수업 전에 수업과 아무 상관 없는 이야기를 한다. 내가 “선본 이름이 <바로>래요. 여기 신학대인데 그래도 돼요?”라고 물었는데 학생들이 아무런 동요가 없다. 뭐지? 왜 아무도 안 웃지? 한 학생이 답한다. “신학 전공 학생들 선본 이름이에요.” 심지어 신학 전공 학생회 선본이란다. 이게 된다고? 그런데 아무도 웃지 않는다. 나는 뭔가 잘못되었음을 직감하고 곧바로 수업을 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다. 왜 아무도 이걸 듣고 안 웃지? 다들 선본 이름 가지고 신나게 웃었는데 나 혼자 뒷북 치는 건가? <언어철학> 수업 끝나고 쉬는 시간에 과학철학 대학원생 단체 카톡방에 강의실 복도에서 찍은 학생회 선거 포스터 사진을 올렸다. 사진을 올린 뒤 “여기 신학대인데 선본 이름이 좀...”이라고 글을 썼다. 여기서도 아무도 반응하지 않았다. 대학원생 중에 신학박사인 목사님이 있는데도 그랬다. 왜 그럴까? 10분 정도 있다가 답장이 왔다. 목사님도 이게 왜 문제인가 하고 한참 보다가 뒤늦게 뭔지 알았다고 했다. 학생들은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고, 학교 측에서도 의식하지 않은 것 같다면서, 아마 해당 신학교가 진보적인 교단이어서 다소 허용적이었을 것이고 아마 ㅊㅅ대나 ㄱㅅ대 같은 보수적인 교단이었으면 여러 사람 끌려갔을 수 있다는 농담을 덧붙었다.
<심리철학> 수업 때, 나는 다시 선본 이름을 꺼냈다. 실패할 수 없는 개그인데 이렇게 묻히는 것이 너무 아까웠다. 쉬는 시간에 과학철학 대학원생 단체 카톡방에 올렸던 사진과 그에 대한 목사님의 답장을 언급했다. 여전히 학생들은 이게 뭐가 문제인가 하는 표현으로 눈만 꿈벅꿈뻑 했다. 학생들의 표정이 너무 평온해서 약간 당황스러웠다. 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구약에 <출애굽기> 있잖아요? 안 읽어봤어요?” 한 학생이 자기는 구약은 잘 안 읽어봐서 모른다고 했다. 학생들이 알고 웃지 않는 것이 아니라 몰라서 못 웃는다는 것을 그 때 알았다. 그래서 나는 몇 마디 덧붙였다.
“애굽이 이집트잖아요? 이집트를 한자로 음차해서 애굽인 거고, 그래서 <출애굽기>는 <이집트 탈출기>라는 뜻이잖아요. 개역개정판 성서에 ‘바로’라고 나오는 게 뭐냐 하면 ‘파라오’를 한문으로 음차한 거예요. 그러니까 여기가 신학대인데 선본 이름은 <바로>이고, 그 <바로> 선본이 학생들의 목소리를 듣고 약속을 지키겠다는데, 바로가 약속을 바로 안 지킬 것 같잖아요? 열 가지 정도 재앙을 겪어야 약속을 지킬 것 같지 않아요?”
그제야 학생들이 웃기 시작했다. 신학대 다닌다고 해서 다 개신교 신자는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나의 이종사촌 동생도 이 학교를 졸업했지만 지금도 교회는 다니지 않는다), 바로가 파라오의 음차라는 것을 학생들이 모를 줄은 몰랐다. 그렇게 학생들이 한참 웃을 때 목사님의 두 번째 가설(진보적인 교단이라서 허용적인 분위기가 있었을 것이다)을 말했다. 그러자 졸던 학생들도 깨서 웃었다.
(2024.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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