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지금 아르바이트 하는 회사에 오게 된 것은 같은 학교 대학원에 다니던 대학원생이 불러서였다. 그 대학원생이 어느 날 회사에 취업하더니 과장이 되었고 나에게 아르바이트를 제안했다. 다른 회사를 다닌 적은 없고 이번 회사가 첫 직장이라고 하는데 입사하자마자 과장이 되었다고 한다. 어떻게 그게 가능하느냐는 나의 물음에 과장은 자기도 모른다고, 회사에서 안 가르쳐주었다고 말했다. 과장 나름대로 세운 가설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박사수료를 회사에서 경력으로 인정해서 과장이 되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회사에 제시한 연봉이 과장 연봉이라서 과장이 되었다는 것이다. 내가 볼 때는 첫 번째 가설이 더 타당한 것 같다. 본부장 연봉을 불렀다고 해서 본부장을 시켜주지는 않았을 것 아닌가?
내가 아르바이트 하며 보는 과장은 대학원 다닐 때 보던 생기 있던 대학원생이 아니라 피곤에 절어있는 직장인이다. 수면 부족에 시달리는 게 보인다. 과장은 “대학원에서 이렇게 공부했으면 학위를 받고 나왔을 것”이라고 말했다. 내가 회사를 정식으로 다니는 것은 아니라서 잘 모르기는 하지만 대충 옆에서 봐도 회사의 업무 관리는 인문대 대학원에서 보았던 학생의 학업 관리와는 다르다. 회사에서는 ver.0.1부터 시작해서 작업 진척 상황을 주기적으로 보고하고 버전별로 달라진 점을 빠르게 점검한다. 다음 보고 기한까지 기존 보고의 문제를 개선하고 새로운 내용을 추가해야 하니 대학원 다닐 때보다 잠을 못 자는 모양이다.
회사에서 업무 진행 상황을 보고하는 것을 보다가 이걸 인문대나 인문계열 대학원에 적용하면 학생을 더 효율적으로 관리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인문대 전반의 사정을 다 아는 것은 아니고 몇몇 선생님들의 사례를 알 뿐이지만, 지도 학생이 일정 수 이상인 연구실은 사정이 대체로 비슷한 것 같다. 한 학기에 두세 번 정도로 정기 면담하고 대학원생들끼리 돌아가면서 연구 결과를 발표한다. 그러면 지도교수 동반 전공자 모임을 한 달에 한 번 하면 1년에 열두 명(방학 때 안 하면 여덟 명)이고, 한 달에 두 번 하면 1년에 스물네 명(방학 때 안 하면 열여섯 명)이다. 그런데 한 달에 한 번 하는 것도 교수 사정상 못할 수가 있다. 일단 모이면 한 사람이 40분에서 1시간 가량 발표하고, 질의응답까지 하면 1시간 30분에서 2시간 가량 시간이 소요되고, 모인 김에 식사라도 하면 추가로 한두 시간이 더 소요되기 때문이다.
한 학생의 연구 상태를 점검하는 시간을 줄이면 한 번에 여러 학생의 연구 상태를 점검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한 번 모일 때 짧게 만나되 자주 모이고 발전된 것이 눈에 보일 정도가 된 사람 위주로 발표시킨다면 어떨까? 어차피 사람이 아무리 바빠도 밥은 먹어야 하고 커피는 마셔야 하니까 1주일에 한 번 정도는 점심 먹고 다 모여서 한 시간 이내로 커피 마시는 것은 가능할 것이다. 이 때 학생들의 연구 진척 상황을 점검하는 것이다. 연구 내용 전체를 다 듣는 게 아니라 기존 버전의 결함을 보완한 부분과 새로 추가될 내용에 대해서만 한 사람당 5분 이내로 간략하게 확인하고 넘어간다고 해보자. 가령, ver.0.3에서 지적받은 것을 ver.0.4에서 어떻게 바꾸었고 무엇을 추가했는지 말하고 해당 내용을 A4용지 반 쪽 이내로 정리해 오기로 한다면, 정말로 5분 이내로 점검할 수도 있을지도 모른다. 비슷한 주제로 연구하는 박사과정생과 석사과정생을 묶어서 서로 협업하거나 관리하도록 유도한다면 교수가 투입해야 할 노동량은 줄어들 것이다. 발표는 ver.1.0에서 ver.2.0으로 넘어가는 학생에게 시키면 될 것이다. 물론, 연구에 별다른 진전이 없는 학생도 있을 수 있는데, 어차피 학생이 많으면 꼭 그 학생이 연구를 잘할 필요는 없으니까 굳이 압박을 주거나 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어차피 그 학생 인생이지 교수 인생은 아니지 않은가?
그런데 남들이 안 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어서 실제로 이런 식으로 해보면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문제점이 발견될 수도 있을 것이다. 내가 교수가 될 가능성 자체가 극히 낮고 어쩌다 된다고 해도 대학원생이 없거나 한두 명인 상황이 될 것 같은데 그래도 혹시라도 일정 인원 이상이 되는 경우가 있으면 내가 시험해 보아야겠다. 대학원 선배 중 아직 강사인 선배한테 이러한 구상에 대해 이야기한 적은 있다. 그런데 지도교수가 이러한 시도를 하는 것은 썩 좋지 않다. 내가 힘들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도를 한다고 하더라도 내가 졸업한 이후에 해야 하므로 졸업하기 전까지 지도교수님께 이러한 관리 방법을 제안하지는 않을 생각이다.
* 뱀발
이러한 나의 구상을 접한 어떤 철학박사는 “그렇게 제가 졸업했습니다”라고 말했다. 역시나 그럴듯하다고 생각되는 건 이미 어디엔가 실행되고 있는 모양이다.
(2023.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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