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역에 가려고 마을버스를 탔다. 내가 앉은 좌석 옆에 애인 사이로 보이는 남녀가 손을 잡고 서 있었다. 남자가 이공계 쪽 대학원생이었던 모양이다. 남자는 여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는 분한테 크리스마스 때 뭐 하실 거냐고 물었는데 그 분은 여자친구하고 같이 있을 건데 여자친구가 사람 많은 것을 안 좋아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 아직 모르겠다고 하는 거야. 그래서 내가 ‘그러면 이번 크리스마스에 두 분이서 포항 가속기에 가보세요’라고 했어. 거기 엄청 넓고 사람도 없잖아.”
여기서 말하는 ‘포항 가속기’는 포항공대에 있는 입자가속기(방사광가속기)를 가리킨다.
“포항 가속기에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게 아니잖아. 허가받은 사람만 들어갈 수 있는데 크리스마스 때 거기 같이 가면 평생 기억에 남지 않겠어?”
여자친구가 거기 가서 좋아하든 안 좋아하든 평생 기억에 남기는 할 것이다. 그런데 남자의 말에 여자는 이렇게 답했다. “와, 진짜 평생 기억에 남겠다. 나도 가고 싶다.” 여자도 이공계 쪽 대학원생인지, 이공계는 아니고 그냥 호기심이 많은 사람인지는 모르겠다.
나도 크리스마스 이브를 포항공대 방사광가속기 시설에서 보낸다면 좋든 안 좋든 평생 기억에 남을 것 같기는 하다. 그런데 거기에 어떻게 들어가지? 이미 나보다 어린 사람들이 이공계 쪽 신임 교수로 임용되는 상황이라 대학원생은 그보다도 한참 어리다. 이공계 대학원생을 꼬시는 건 글러먹었다. 그렇다고 교수를 꼬시겠는가? 이거나 저거나 다 글러먹은 것 같다.
(2023.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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