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에 마을 창고부지에 어떤 놈들이 정체불명의 검은 물질을 파묻어서 경찰에 신고했는데, 결국 범인을 잡지 못했다. 아무리 시골이라고 하지만 곳곳에 CCTV가 있고, 심지어 매립 일시까지 비교적 정확하게 경찰에 신고했는데, 왜 범인을 못 잡았을까? 경찰이 쳐놀았나? 그랬을 수도 있지만, 법영상 분석 전문가 황민구 소장의 말에 따르면 경찰이 일을 멀쩡히 했더라도 못 잡았을 수도 있음을 알 수 있다.
전국에 있는 CCTV는 400-500만 대인 것으로 추정되며, 일반 가정용 CCTV나 차량용 블랙박스까지 포함하면 1천만 대 이상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도 CCTV가 제 기능을 못 해서 사건 해결에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있다. 이는 세 가지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첫 번째는 화질과 보존 용량 같은 성능이나 기술적인 문제이다. 저화질이라서 영상 전문가의 도움 없이는 증거 자료로 쓸 수 없는 경우도 많고, 보존 기간도 한두 달 정도라서 영상 자체가 없어지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는 두 번째 측면인 경제적인 문제 때문인데, CCTV 한 대당 500만 원에서 1천만 원 정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법적인 측면이 CCTV 활용을 가로막는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내가 찍힌 CCTV가 다른 사람의 소유일 때, 내가 찍힌 영상이라고 하더라도 영장이 없으면 CCTV 소유자에게서 영상 원본을 못 받아온다. 그러면 많은 경우 휴대전화로 모니터를 찍어오는데, 이렇게 되면 화질 개선도 안 되고 시간이 지나면 원본 자체가 사라진다. 일반인뿐만 아니라 경찰들도 모니터를 찍어오는 경우가 있는데, 이 또한 영장 받아오고 허가받는 데 걸리는 시간과 절차 때문이다.
이게 2022년의 이야기라고 한다면, 10년쯤 전 또는 20년쯤 전에 CCTV 설치를 둘러싸고 찬반 논쟁이 벌어질 때 나온 이야기는 다 무엇인가? 범죄 예방을 위해 CCTV를 설치해야 한다고 할 때, 인권이 어쩌네, 사생활이 어쩌네 하는 소리를 한 건 무엇인가? 도대체 밖에서 무슨 짓을 하길래 길바닥에 CCTV를 설치했다고 사생활을 침해한다는 것인가? CCTV를 설치해도 제 기능을 못 해서 범인을 못 잡는 판인데, 무슨 인권 문제가 발생한다는 것인가? 죄다 똥 같은 소리였던 것이다. 관련 분야 전문가들의 논의야 사회적으로 유의미한 것이었겠지만, 쟁점과 관련된 기술적・경제적・법적 측면에 대하여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들이 늘 하던 대로 판옵티콘이니 시선이니 권력이니 하는 소리나 늘어놓는 것이 뭐가 그리 대단한 사회참여적 활동이었겠는가?
CCTV 설치를 두고 벌어졌던 논쟁을 두고, 마치 판옵티콘의 실현을 두고 대단한 논쟁을 벌인 것처럼 호들갑 떠는 사람들이 아직도 있는 모양이다. 그 당시에는 다들 잘 모르니까 그랬다고 치겠는데, 놀랍게도 비교적 최근까지도 CCTV 논쟁을 끌어와서는 오늘날의 기술적인 문제와 대입하여 아무 소리나 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 만일 어떤 학위 소지자가 강연이나 토론의 서두에 CCTV 논쟁을 언급하며 판옵티콘 소리를 한다면, ‘학위만 있는 비-전문가가 대입 논술 수준으로 아무 말이나 떠들겠다고 시동을 거는구나’ 하고 받아들이면 될 것이다.
* 링크: [그알저알] EP.34 법영상 분석가 황민구의 재능낭비! 착시 사진 챌린지
( www.youtube.com/watch?v=HHn8ViPoHCQ )
(2023.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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