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주 전, 내가 다니는 학교의 평생교육원에서 연락이 왔다. 고등학생 대상으로 5회 동안 『목민심서』 강의를 해줄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목민심서』를 고등학생한테 가르친다고? 듣자마자 느낌이 왔다. ‘아, 어느 학교 교사가 또 프로그램을 잘못 짰구나.’ 내가 일정을 보고 답변하겠다고 하니, 평생교육원에서는 강의 시작 날짜가 촉박해서 빨리 결정하면 좋겠다고 했다. 언제 시작이냐고 하니 다음 주라고 했다.
사실, 나한테 『목민심서』 강의 아르바이트가 들어오는 것부터가 말이 안 된다. 『목민심서』를 가지고 고등학교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면, 우선순위가 한문학과, 정치학과(동양사상 쪽), 사학과(한국사 쪽) 정도 될 것이다. 동양철학만 해도 『목민심서』를 읽을 일이 거의 없을 것이므로 우선순위에서 멀 텐데, 심지어 내 전공은 서양철학이다. 그런데도 나에게 아르바이트 제안이 왔다. 이는 내 앞 순번의 사람들이 해당 아르바이트 제안을 모두 거절했다는 것이다. 강의 시작 날짜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도 그렇다. 촉박하다는 것은 앞 순번의 사람들이 계속 거절하는 바람에 시간이 많이 지났다는 것이다.
내가 해당 분야 전공자도 아니지만, 해당 아르바이트를 하려고 하면 할 수는 있었다. 고등학생들 대상으로 하는 정도의 수준이기 때문이다. 강의를 동영상으로 촬영해서 남긴다면 절대로 하지 않겠지만, 학생들의 기억으로만 남을 것이기 때문에, 약간 틀리더라도 아무 문제가 안 생길 것이었다. 그리고 이 강의를 전공자도 안 하고 나도 안 하면, 결국은 정약용의 애민 정신 같은 소리나 하는 사람들이 『목민심서』를 가르칠 것이다. 그러니 내가 하는 것이 맞다. 예전에 제안받았던 것처럼, 미래의 과학기사가 어떻게 바뀔지 고등학생에게 강의해달라는, 거의 사기 수준의 부탁을 받는다면, 나는 강의하러 가기 전에 천사소녀 네티처럼 “주님, 제가 사기꾼이 되는 것을 허락해주세요” 하고 기도해야 하겠지만(그래서 그 아르바이트는 정중히 거절했다), 『목민심서』는 그 정도는 아니므로 하기로 했다.
강의 시작 하기 전에 『목민심서』 관련 논문도 찾기도 했는데, 다른 할 일도 많고 강사료를 그렇게 많이 받는 것도 아니어서 근로 의욕이 그렇게 샘솟지 않았다. 결국은 첫날에 그냥 애드립으로 두 시간 동안 이야기했다. 그렇게 해도 아무 문제 없이 수업이 진행되어서 2회부터 5회까지는 별도의 자료 없이 『목민심서』와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만 가지고 수업을 진행했다. 역시나 아무 문제가 없었다. 읽다가 학생들이 모르는 단어가 나오면 하나 설명하는 데 10-15분씩 소요되니 수업 전에 특별히 준비할 필요가 없었다.
가령, 『목민심서』에 표류선 조사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러면 그걸 수령이 왜 해야 하는지, 조사 기록이 왜 비변사로 가는지, 그걸 오늘날 경제사 연구자들이 어떻게 활용하는지 등을 이야기한다. 다산이 보낸 편지에 조괄이 나오면, 중국 전국시대를 설명한다. 그러면 시간이 잘 간다. 다산의 둘째 아들이 닭을 키운다는 소식을 듣고 『계경』(鷄經)을 지어보라고 권하는 부분도 나온다. 그러면 경(經)이 무엇인지, 경사자집(經史子集)이 무엇인지, 닭 키우는 것 가지고 경을 지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은 당시 경에 대한 개념이 이전과는 달라진 것으로 보이는데 이것이 청대 고증학하고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닌지 등을 이야기한다, 이런 이야기를 해도 10-15분은 금방 간다. 그렇게 설명하고 나서 보니, 그 다음 장에 격물(格物)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러면 격물에 대해 한참 설명한다. 격물 치지 성의 정심 수신 제가 치국 평천하가 『대학』(大學)에 나오는 8조목인데, 다산이 말하는 격물하고 주희가 말한 격물이 같은 거냐 아니냐, 왕수인은 왜 대나무를 째려봤냐, 이런 이야기를 한참 하면 또 10-15분이 간다. 그렇게 편지 한두 통 하는 데 한 시간이 지나간다.
이렇게 5회를 끝내고 나서 평생교육원에서 또 전화가 왔다. 이번에는 고등학교에서 글쓰기 강의를 해줄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이번에도 날짜가 촉박하다고 했다. 내가 연락받은 것은 금요일 오후였는데 강의 시작은 그 다음 주 수요일이었다. 어쨌든 하기로 하고 월요일에 해당 고등학교의 선생님과 통화했다.
고등학교 선생님이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께서 고등학생들 대상으로 강의 경험이 많다고 평생교육원에서 소개해주셨어요.”, “아, 네... 그런데 그렇게 강의를 많이 한 건 아닌데...”, “선생님께서 고등학생들 대상으로 글쓰기 강의도 많이 하셨고...” 나는 고등학교에서 글쓰기 강의를 해본 적이 없었다. “지난 번에 ◯◯고에서도 글쓰기 강의를 하셨다고 하더라구요.”, “네?” 태어나서 처음 들어보는 고등학교였다.
나는 내가 교육과 사기의 중간에 서 있다고 생각했는데, 진짜 사기는 평생교육원에서 쳤던 것인가. 사기가 아니라 서류상 착오가 있었을 수도 있겠다.
(2021.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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