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4/15

고려사를 한 문장으로 줄인다면



어떤 대학원생이 나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 “고려사를 한 문장으로 줄이라고 하면 뭐라고 답해야 할까요?” 학원에서 초등학생이나 중학생을 대상으로 논술을 가르쳐야 하는데 전임자가 그런 방식으로 가르쳐서 자기도 그런 식으로 가르쳐야 한다고 한다. 고려사뿐만 아니라 엘리자베스 여왕 같은 것도 가르쳐야 한다고 한다.


고려사를 한 문장으로 뭐라고 표현할지 3초 정도 생각해봤는데 마땅한 답이 생각나지 않았다. ‘전임자가 얼마나 고려사를 잘 알기에 고려사 500년을 한 문장으로 줄였나?’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전임자는 엘리자베스 여왕도 한 문장으로 줄여서 설명했다. 웬만한 역사 전공자라고 해도 고려사와 영국사를 모두 잘 알기는 어렵다. 그런데도 그랬다는 것은 전임자가 전문 지식 없이 상식에 기초해서 수강생들을 대충 후려쳤다는 말이다. 그러니 질문에 대한 답을 굳이 진지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나 같으면 이렇게 할 것이다. 첫 시간에 학생들에게 질문을 던진다. “고려사를 한 문장으로 줄인다면 뭐라고 해야 할까요?”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답하지 않으면 몇 명 지목해서 질문한다. 몇 명은 모른다면서 대답을 피할 것이고, 몇 명은 까불면서 이상한 대답을 할 것이고, 몇 명은 나름대로 진지한 대답을 할 것이다. 이렇게 분위기를 진지하게 몰아간 다음에 학생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사교육 하는 사람들 중에 고려사 같은 것을 한 문장으로 줄이면 뭐라고 뭐라고 하는 사람이 있거든요? 다 사기꾼입니다. 조선 초기에 『고려사』를 편찬해요. 그러고 나서 『고려사절요』가 나옵니다. 『고려사절요』가 왜 나왔느냐. 『고려사』의 분량이 너무 많아서 축약본이 나온 거예요. 그런데 그렇게 줄인 『고려사절요』도 양이 많단 말이에요. 고려사를 한 줄로 줄일 수 있으면 한 줄로 줄이지 『고려사절요』를 왜 편찬했겠어요? 고려사를 한 문장으로 줄이면 어떠어떠하다고 말하는 사람들 다 사기꾼입니다. 제대로 알고 그런 소리 하는 게 아니에요.”


이렇게 말해도 구습에 젖어서 의심스러운 눈으로 강사를 바라보는 학생들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면 그 학생을 지목해서 물어본다. “너 몇 살이야?”, “열다섯 살이요.”, “네 인생을 한 문장으로 설명해봐.” 잘 대답할 리 없고 설사 대답을 잘 해도 트집 잡으면 된다. 그러고 나서 이렇게 말한다. “15년 인생도 한 문장으로 설명하기 어려운데 고려사 500년을 한 문장으로 설명한다고 하면 그 사람은 사기꾼이겠어 아니겠어?”


내가 하려는 말이 청자가 기존에 알던 것과 배치된다면 청자를 한 번 흔들어놓고 나서 원래 하려는 말을 꺼내는 것이 좋다. 이것은 중세 전쟁에서 기병으로 상대 진영을 흔들어놓은 다음에 보병을 보병으로 밀어붙이는 것과 비슷하다. 그리고 시장에 새로 진입하는 사람이라면, 그리고 능력이 웬만큼 되는 사람이라면, 시장을 점유하는 사람을 한 번 밟고 가는 것도 좋은 전략일 수 있다.



(2019.0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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