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Evan R. Ragland (2017), ““Making Trials” in Sixteenth- and Early Seventeenth-Century European Academic Medicine”, Isis 108(3), pp. 503-528. ]
1. Sources from Ancient and Medieval Medicine: Method and Experimenta
2. Medicinal, Natural Historical, and Chymical Trials from the Sixteenth Century
3. Anatomical Trials from the Sixteenth and Early Seventeenth Centuries
4. Conclusions and Suggestions
피터 디어는 “periculum facere”(“to make a trial”)라는 구가 16세기에 실험을 정교하게 설계할 때 사용되었다고 주장한다. 이 설명은 수학적 과학을 근세 과학 실험의 기초 토대로 여긴다. 이 논문에서 래글랜드는 “periculum facere” 구를 사용한 16세기 외과의사들의 작업을 탐구한다.
16세기 “경험”(experience)과 “실험”(experiment)에 대한 철학적 논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분석론 후서>(Posterior Analytics)에서 시작된다. 실험은 아리스토텔레스 식 전-근대 실험(premodern experience)의 이념에서 비롯된다. 디어는 16세기의 새로운 경험 개념을 일반적인 아리스토텔레스 식 경험 개념과 대조하여 근대 수학적 과학이 자연철학의 영역에 속할 때 사용된다고 한다.
디어의 경험, 실험, 수학의 관계에 대한 연구는 토마스 쿤의 1976년 논문에 대한 대응으로 읽을 수도 있다. 그 논문에서 쿤은 수학이 한 역할은 별로 없고 실험이 더 큰 역할을 했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쿤과 디어가 모두 사용하는 (영국식) 실험 스타일은 로버트 보일의 실험 스타일을 말한다.
쿤은 수학적 과학을 입증하기 위해 실험을 사용하는 것과 실험 과학에서 휴리스틱한 가치 때문에 사용한다는 이분법을 사용하는데, 래글랜드는 16세기 의학 실험은 이전 이론을 입증하거나 시험하는 것과 새로운 지식을 만들어내는 두 목적을 모두 지지한다고 논증한다.
실험에 대한 이전의 연구들은 중세 아랍과 라틴 광학에서 시작하여 프톨레마이오스의 경험적 시험 프로그램과 16세기 빈센초 갈릴레이의 시험을 비교하려는 시도로 이어진다. 중세 연금술에서 보일의 화학까지 연속성을 강조하며 자연 마술(natural magic)의 전통이 윌리엄 길버트와 프랜시스 베이컨의 실험을 포함한다. 이러한 이전 연구들은 르네상스 의학을 제외한다. 래글랜드는 개별 사건들에 대한 일반적인 지식을 산출하고 보편적 지식에 대한 주장을 입증하는 개인적인 실험에서 나타나는 언어적 구성의 예를 분석하며 1인칭적 경험(first-person experience)의 인식적 중요성을 서술하는 증거를 탐구한다.
1. Sources from Ancient and Medieval Medicine: Method and Experimenta
제프리 로이드(Geoffrey Lloyd)는 갈렌과 다른 외과의사들이 동등하게 여겨지는 이론들에 대한 중립적 심판자로서의 실험에 대한 이상을 가지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갈렌과 다른 고대 외과의사들은 반대자들의 지위를 반-입증하기 위해 산 동물에 대해서도 억지스럽고 복잡한 실험(interventions)을 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시험에 “반복가능성”, 변수 통제 등을 끌어들였으나 여전히 고대 의학 시험에서 드물었고 결정적인 것이 아니었다. 에라시스트라투스(Erasistratus)의 맥박 설명에 대한 갈렌의 반박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갈렌과 그의 후계자들에 따르면 질병과 건강에 대한 숨은 원인에 대한 지각 가능한 것에서 합리적 추론을 하는 것은 경험이나 시험(peira)에 의해 입증되어야만 하며, 특히 약의 속성을 발견할 때, 정보를 전달하는 경험이나 시험만이 그 결과를 결정해야 한다. 즉, 시험(peira)만이 물질의 속성을 알 수 있는 방법이다. 의학 시험에 대한 갈렌-아랍 식 모형은 방법론에 대한 논의의 주요한 근원을 제공했다. 아비첸나는 갈렌의 규칙들을 발전시켜 경험의 “오솔길”로부터 약의 의학적 속성에 대한 지식을 산출하는 일곱 가지 조건을 정교화했다.
약은 열이나 추위 같은 우연적인 질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약은 두 대조적인 질병에 시험해야 한다.
약을 시험할 때는 약한 병에 먼저 시험하고 점점 강한 병에 시험해야 한다.
약의 작용 기간을 기록해야 한다.(약의 영향을 관찰해야 한다, 약은 인체에 시험해야 한다 등.
갈렌의 방법론적 논의는 이후 의학과 철학에 알려졌다. 헤르만 랜달(Herman Randal)은 1200년대부터 갈릴레오의 실행까지 분석하여, 의학 교재는 갈렌의 <Ars medica>의 연장으로서 형성되었으며 분석, 종합, 분해라는 세 가지 방식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을 밝혔다. 갈렌은 인과적 의학 지식을 산출하고 입증할 때 이성과 경험의 독립성을 강조했는데, 이 영향으로 와괴의사들은 “이성과 경험”(ratio et experientia)이라는 구호를 17세기까지 가져간다. 외과의사들이 고대의 권위를 비판하고 방법론을 논의했지만, 우리는 그들의 시험에 대한 증거가 여전히 부족하다. 16세기 라틴어로 번역된 갈렌의 저작은 ‘experimenta’로서 설계된 절개를 기술하는데 이 때 “experimentum”과 “periculum”의 구분이 모호하다.
2. Medicinal, Natural Historical, and Chymical Trials from the Sixteenth Century
16세기 저자들은 ‘시험하다’라는 의미로 “periculum facere”라는 구를 라틴어 문헌에서 인용한다.
(이 구는 키케로 그리고 푸블리우스 테렌티우스 아페르(Terence)와 티투스 마키우스 플라우투스(Plautus)의 희곡에서 유래한다.)
16세기 사전에서 이 단어는 증명, 시험, 위험(jeopardy)과 연결시키고 1600년대 철학적 문헌들에서 “periculum”은 교육적, 법적, 철학적 맥락에서 사용된다.
초기 예로 드는 것은 마르실리오 피치노(Marsilio Ficino)의 <Consilio>를 1518년 라틴어로 번역한 것이다. 여기서 “I made a trial just in this present year [periculum feci]”의 다음에 기술하는 것이 “I made an experience [experientiam feci]”이다. 1481년에 출판된 원래 이탈리아어 판본에서 “Ho provata” 또는 “I tried/pruved”가 등장하는데 이는 앨리샤 랜킨이 말하듯, 16세기 치료사들은 조제법을 시험하고 약효에 대해 의사소통 할 때 “시험하고 반복하고 증언하는” 관행을 발전시킨 것을 보여준다.
외과의사이자 자연학자인 피에트로 안드레아 마티올리(Pietro Andrea Mattioli, 1501-1577)는 “산쥐”(mountain mice)와 이빨에 대한 1인칭적 주장을 했는데 래글랜드는 그 당시 독자들이 마티올리의 주장을 매우 몽상적으로 받아들였을 것이라고 분석한다,
* 1인칭적 주장 - “산쥐들은 손 같은 앞발을 사용하여 곰과 같은 방식으로 오른다. 토끼처럼 어금니가 네 개인데, 더 길고 날카로워서 더 사납게 자른다. 그리고 (나는 실제로 시험해보았고 확실히 증언할 수 있는데) 이빨을 자르면 어떻게 하룻밤 안에 다시 자라나는지 궁금하다.”
왜냐하면 마티올리는 자신의 주장을 1554년판 개인적 시험과 관련하여 강화시키기 때문이다. 마티올리는 자연사에서의 시험은 징조와 전조에 관한 믿음에 의문을 제기한다고 한다. 예로 드는 것이 나무의 혹병(gall)이다. 고대에는 혹병에서 파리가 발생하면 전쟁이 일어난다고 하며 어떤 벌레가 나오느냐에 따라 재앙의 종류도 달라진다고 하는데 마티올리의 시험, 즉 1인칭 경험에서 ‘모든’ 혹병 속에는 그런 벌레가 들어있지 않다고 한다. 프란체스코 래디(Francesco Redi)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으나 혹병 2만 개를 절개했는데 마티올리는 그것에 비해 적은 1인칭 시험을 하고 일반화된 결론을 얻었다.
마티올리는 의학적 치료법에 관한 논의에서 “periculum facere”를 빈번하게 사용했고 때때로 “periculum facere”를 상대적으로 단순한 시험을 기술할 때 썼다. 이는 자신이 받아들인 디오스코리데스(Pedanius Dioscorides), 플리니, 갈렌의 치료법을 시험할 뿐 아니라 1인칭으로 그 치료법의 효능을 증언할 때 사용되었다.
16세기 후반 자연사에서 의학 시험은 계속된다. 울리세 알드로반디(Ulisse Aldrovandi, 1522-1605)는 학생들에게 의학 자료(materia medica)와 의학 시험의 유용성을 강조했다. 또 다른 주도적인 인물은 가브리엘 팔로피오(Gabriele Falloppio, 1523?-1562)인데 팔로디오는 매독(French disease)과 광천수에 대한 시험을 언급했다. 팔로피오는 <약제가 든 물과 광물질에 관하여>(On Medicated Waters and Minerals)라는 책에서 온천의 대중적 사용에 대한 논쟁에 개입했다. 지롤라모 사보나롤라(Michele Savonarola)는 팔로피오보다 한 세기 전에 기록을 남겼는데 팔로피오는 사보나롤라의 주장이 근거가 없으며, 팔로피오 자신은 적절한 시험을 할 수 없으므로 온천의 구성성분에 대한 지식에 대한 주장을 하지 않았다. 팔로피오에게 특정한 지식은 주장은 특정한 물에 대한 주장이라서 시험을 다른 사람의 주장을 거부할 때 사용했다.
팔로피오는 사보나롤라처럼 속은 사람과 거짓말(mendacium)을 구분하고 1인칭 시험과 그 사람의 기술로 반복 증명하는 것에 의한 지식을 신뢰했다.
* 지식 - “우연히 경험에 의해 발견된 온천의 사용, 그리고 그 사용은 어떠한 근거(reason)에 의한 입증”
파두아 대학에서 약재(materia medica)를 가르칠 때 증류에 대한 논의를 하면서 팔로피오는 증류만이 외과의사들에게 광물을 확인하고 의학적 효능이 있는 물질을 모으거나 농축하게 할 수 있다고 했다. 증류를 통하여 자신의 주장을 하고 반대자들을 비판한 것이다. 팔로피오는 “periculum facere”를 어떠한 주장이나 물질에 대한 정교한 시험을 설계하는 데 사용하고 “experimentum facere”은 특정한 주장이나 논제 없이 수행하는 시험에 사용함했다. 이때 Experimenta는 혼합된 물질들을 점진적으로 드러나게 하는 것이다.
팔라피오의 책은 온천의 톡성에 대한 범주 이상이다. 첵 제목 페이지에 자신을 “외과의사이자 철학자”라고 선언했다. 팔라피오의 궁극적인 목표는 물에 대한 철학적 자연사 작업을 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이고 인과적인 지식을 질병의 치료로 돌리는 것이고 그 방법은 관찰이다.
그러나 팔로피오와 마티올리의 시험들은 사변적인 자연철학의 필수 구성성분은 아니었다. 자연철학을 보편적인 참을 추구하고 시험들이 철학 체계와 정합적이게 되는 데 좋은 상황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당시는 시험이나 일반화된 결론은 아리스토텔레스 식 학문(scientia)의 이상에 도달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였다. “원인들을 탐구하게 위한 예비로서의 지식”으로 받아들여진 자연사는 지식으로 받아들여졌다.
브라이언 오길비(Brian Ogilvie)가 지적했듯, 외과의사-자연학자들은 다양한 실험 개념을 적용했다. 초기 자연학자들은 “의학의 맥락”에서 작업했고 나중에는 철학적인 지위를 향상시켰다. 1490년대 플리니우스에 대한 논쟁부터 16세기까지 개별적 주장과 일반적 주장에 대한 논쟁은 의학 연구자와 자연적 개별자들을 시험하는 교사들을 이끌었는데 이는 17세기 혁신과도 비슷한 패턴이다.
3. Anatomical Trials from the Sixteenth and Early Seventeenth Centuries
“periculum facere”는 1540년대부터 영향력 있는 해부학 저작들에 등장하며 베렌가리오 다 카르피(Jacopo Berengario da Carpi), 안드레아스 베살리우스(Andreas Vesalius), 팔로피오, 콜롬보(Realdo Colombo), 파브리시우스 아브 아쿠아펜덴테(Fabricius ab Acquapendente)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로저 프렌치는16세기 초반 베렌가리오 다 카르피가 감각 경험을 신뢰하여 논쟁이 되는 것을 해소하기 위해 “실험적 증명”을 사용했다고 주장한다. 신장의 기능과 자궁에서 태아의 활동력에 관한 실험이 대표적인데 이 실험에서 베렌가리오는 자기 경험의 권위를 강조할 뿐 아니라 자기 실험의 단독성(singularity)과 역사성(historicity)도 강조했다. 베렌가리오의 실험은 일양적이지는 않았지만 경험한 것들을 서술하여 태아가 마지막달에 소변을 만들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일반적인 주장을 했다.
베살리우스의 1543년 <파브리카>(Fabrica)의 마지막 책에서 갈렌의 생체해부 실험을 논의했다. 베살리우스는 갈대로 동맥의 부분을 교체하며 갈렌의 실험을 반복하고 갈렌과 같은 용어로 그 실험을 기술했다. <파브리카> 1판에서 베살리우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의견을 “시험함”(“tested” or “tried”)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는데 2판에서 “periculum facere”를 사용했다. 같은 시험을 다른 용어로 기술한 것인데 베살리우스의 단일한 시험이 모든 동물에 사용된 아리스토텔레스의 일반 이론을 거부할 인식론적 근거를 제공했기 때문이다. 나중에 베살리우스는 의학이 정교한 지식을 산출한다고 할 때 의학의 지위를 학문(scientia)이라고 강조했다.
콜롬보의 1559년 <해부학에 대하여>(De re anatomica)는 베살리우스의 <파브리카>에 대한 답변으로 쓴 것이다. 여기서 콜롬보는 여기서 “경험/실험에 의한 증명/입증”(experimento comprobare)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이는 갈렌의 주장이 틀렸음을 보이기 위해 사용되었으며“periculum facere”도 사용되었다.
베살리우스와 팔로피오의 이후 세대 중에는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인 파브리시우스 아브 아쿠아펜덴테(Fabricius ab Acquapendente)가 있다. 파브리시우스는 파두아 대학에서 팔로피오에게서 배웠고 파브리우스의 제자 중에 윌리엄 하비(1578-1657)가 있었다. 하비는 1628년 『심장과 피의 운동에 대해서』(De motu cordis et sanguinis)에서 팔을 실로 묶는 실험을 기술했다. 여기서 하비는 “peiculum”보다는 “experimentum facere”를 “experiri”라는 형태로 썼는데, 어떠한 실험 내용을 가정법으로 쓰거나 관찰을 기술할 때도 하비는 experimenta를 시험(test)이라는 뜻으로 썼다.
하비 이후 “periculum facere”라는 구는 17세기에 많은 핵심 의학 저작물에서 어떠한 주장이나 현상을 시험한다는 의미로 나타난다. 로저 프렌치가 지적하듯, 이러한 것은 산토리오 산토리오(Santorio Santorio), 장 페크(jean pecquet), 토마스 바톨린(Thomas Bartholin), 알버트 카이퍼(Alber Kyper)에서도 볼 수 있다. 하비의 실험은 레이든과 옥스퍼드 등의 실험 프로그램에 촉매제가 되었다.
4. Conclusions and Suggestions
16세기 학문적인 외과의사들은 어떤 대상이나 주장을 거부하거나 산출하거나 사실적 지식이나 이론적 지식을 보증하기 위해 1인칭 시험을 했다. 이러한 형태의 시험은 17세기 “베이컨 식” 과학에서 더 많이 나온다. 살펴보아야 할 점 중 하나는 의학의 영역에서 학문적 문화와 토착적(vernacular) 문화와 기예적(artisanal) 문화가 연결된다는 점이다. 이 논문에 등장한 증거는 증거는 문법적 태(mood)와 사람에 따라 바뀐다. 외과의사들은 프랜시스 베이컨의 작업에 등장하는 것에 가깝게 자신들의 작업에 정교한 처리를 했고, 체계적이거나 철학적인 스타일로 실험을 정교화했다. 그러나 그러한 실험들은 의학적이거나 철학화된 구성요소가 되지 못했다.
르네상스 시기의 의학에서 실험은 고대 권위에 대한 지속적인 비판, 빈번한 논쟁, 기구 사용, 효용을 목적으로 하고, 증언을 사용하고, 현상을 산출하고, 이론의 예비적인 역사를 시험했다. 16세기의 의학적 배경은 17세기의 영국의 왕립 학회, 프랑스의 과학 아카데미(Académie des sciences), 독일의 Academy of Sciences Leopoldina에서의 의학적 실행가들을 설명한다.
(2019.0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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