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11/15

공부와 전혀 상관없는 재능



계약서에 도장 찍을 일이 있었다. 집에 다녀오면서 막도장을 가져오려고 했는데, 깜빡 잊고 그 도장을 집에 두고 왔다. 학교에도 도장이 없었고 기숙사에도 도장이 없었다. 도장 날인을 서명으로 대체할 수 있는지 직원에게 이메일로 물었다. 직원은 회사 법무팀에서 웬만하면 계약서에 서명을 받지 말고 도장을 받으라고 했으니 도장을 찍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학교에 나 말고도 계약서에 도장을 찍을 사람이 몇 명 더 있어서 업체 직원이 학교에 오기로 했다. 업체 직원도 학교로 온다는데 도장 파러 굳이 학교 밖으로 나가기에는 시간이 아까웠다. 가는 데 20분, 오는 데 20분, 도장 파는 데 10분, 대충 한 시간 정도 걸릴 것이다. 있는 도장을 하나 더 파려니 돈도 아까웠다. 도장을 내가 파기로 했다. 밥 먹고 나서 문구용 칼로 지우개를 깎았다. 20분 쯤 깎으니 도장 비슷한 것이 되었다. 인주가 없어서 지우개에 수성 매직을 칠하고 종이에 찍어보았다. 처음 만든 것 치고는 대충 괜찮았다.








업체 직원을 만나러 갔다. 카페 탁자에는 인주와 계약서가 놓여있었다. 나는 지우개를 꺼내서 업체 직원에게 보여줬다. 직원이 배를 잡고 웃었다. 직원을 만나기 전에 도장 모양이 조금 이상하더라도 놀라지 말라고 할 걸 그랬다. 어쨌든 도장은 나름대로 잘 찍혔고 계약은 성사되었다. 직원은 도장 찍힌 것을 보니 제법 그럴 듯하다고 했다. 이렇게 나는 또 다른 재능을 발견했다.

대학원을 다니면서 공부와 상관없는 재능을 하나씩 발견하고 있다. 이런 일들은 소소한 즐거움을 주기도 하고 대학원을 다니는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공부하는 데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것들이 어떻게 대학원을 다니는 원동력이 되는가? 어떻게 안 굶어죽고 먹고살기는 하겠구나 하는 용기를 주기 때문이다.

(2018.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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