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Peter Dear (1985), “Totius in verba: Rhetoric and Authority in the Early Royal Society”, Isis 76, pp. 145-161. ]
피터 디어는 자연에 대한 협력적 연구 방식이 어떻게 형성되었고,
그러한 연구 방식이 과학 혁명과 관련된 새로운 형태의 자연 지식와 어떻게 연관되어 작동할 수 있었는지를 살펴보고자 함.
여기서 주목하는 것은 왕립 학회
그러나 이러한 새로운 구상은 왕립 학회가 등장하면서 갑자기 만들어진 것은 아니며, 영국에만 존재했다고 할 수 없음.
이 논문에서 왕립학회는 특징적인 유일한 사례가 아니라 과학 혁명기를 이해할 수 있는 한 가지 사례로 다루어짐.
협력 연구의 이상이 투영된 것으로 왕립학회를 미시적으로 살펴봄.
왕립학회에서 과학적 연구를 진행한 스타일.
피터 디어는 왕립학회가 이 시기 자연철학 연구의 구상 중 하나인 공동 연구를 상징하는 단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고 함.
공동 연구는 과학 혁명기 자연철학 연구자들에게 중요한 쟁점이 되었고, 왕립학회가 그러한 연구 활동을 대표할만한 단체였다는 것.
공동 연구가 진행되려면 구성원들이 어떠한 형태의 표준과 기준에 합의해야 함.
공동 목표를 위한 기여의 신뢰도는 어떠한 권위에 의존하여 판단될 수밖에 없었음.
피터 디어는 여기서 “새로운 철학”에서 경험의 지위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말함.
첫째, 실험, 관찰, 목격이 과학 혁명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것도 있지만
둘째, 이 시기의 반-스콜라 철학 저서들은 경험을 고전의 권위에 의존하는 것에 반하는 것으로 간주함.
따라서 경험은 자연철학 연구에서 중요한 요소가 되었고, 권위는 새로운 모습을 갖게 되었으며, 경험이라는 개념과 자연철학 내의 입지도 달라짐.
p. 148
과학혁명기 이전에는 권위가 고대의 문헌, 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문헌에 존재했고 현상은 그저 사실에 대한 일반화된 문장으로 드러난 것.
p. 148
중세와 르네상스기에는 논쟁의 초점은 다른 널리 알려진 진술과 새로운 주장의 일관성 및 호환성에 맞추어짐.
p. 149
근대로 넘어오면서 고전의 권위에 도전하는 이들이 생김.
pp. 150-151
왕립학회가 처음 생겼을 무렵이 그러한 시기.
왕립학회의 회원들은 고전의 권위가 무너지고 아리스토텔레스의 문헌도 한 인간의 생각으로 간주해야 한다는 데는 동의했지만, 그 권위를 대체할 것이 무언인지에 대해서는 합의하지 못함.
따라서 초기 왕립학회는 공동 연구를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없었고, 클럽 이상의 기능을 하지 못함.
이러한 혼란 속에서 왕립 학회의 회원들은 경험을 보고하기 시작함.
고전에 근거하여 세계가 어떻게 움직이는지에 대하여 일반적인 진술을 하는 것이 아니라 짧은 순간에 어떻게 움직였는지에 대한 경험적인 진술이 연구에 이용됨.
예) 보일의 공기펌프 실험
경험적 보고를 통해 관찰자의 개별적인 경험이 새로운 권위를 얻게 됨.
사실 문제를 거론하는 쉐퍼의 입장과는 달리, 피터 디어는 과학 혁명이 특정한 맥락에서 국지적으로 일어난 현상이 아니라 더 넓은 범위에서 일어난 한 가지 사건으로 파악함.
피터 디어는 전혀 다른 맥락에서 왕립학회와 비슷한 실행을 한 플로렌틴 아카테미아 델 치멘토(Florentine Accademia del Cimento)의 예를 들며 그들이 공유하는 맥락을 초월하는 무엇인가가 있음을 말하고자 함.
왕립학회를 한 가지 사례로 보고, 이 사례를 이해하면 연구 스타일과 권위의 이동이 일어난 보다 더 범위의 과학 혁명을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함.
(2018.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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