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원생 중에 지도교수의 서재에 어떤 책이 얼마나 있는지 궁금해 하는 사람들이 간혹 있다. 나도 지도교수님이 어떤 책을 가지고 있는지 궁금했는데 최근에 알게 되었다. 선생님 서재에서 도서 목록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사실, 지도교수님 서재에 어떤 책이 얼마나 있는지 궁금하기는 했지만 이렇게까지 상세히 알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작업은 올해 3월부터 진행되었다. 그 학기에 장학금을 받았고 학부 수업 조교 업무를 하는 대신 도서 목록을 만들었다. 일주일에 1시간 30분씩 하기로 했는데 이는 선생님이 수업 조교의 노동 시간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일 것이다.
교수들 중 상당수는 정년퇴임하면서 책을 버리거나 기증한다. 아마도 서울시내 헌책방에 나오는 매물 중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그러한 도서일 것이다. 정년퇴임한 이후에도 계속 연구를 할 생각이지만 집이 좁아서 책을 학교 도서관에 기증하는 분들도 있고, 정년퇴임 이후에는 공부를 안 할 생각이거나 이미 오래전부터 공부를 안 해서 책을 버리거나 기증하는 분들도 상당수 있다고 알고 있다. 그렇다면 정년퇴임을 앞두고 책을 버리거나 주는 것이 아니라 도서 목록을 작성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앞으로도 연구를 계속 한다는 것이다.
업무 시작에 앞서 선생님은 A4용지 두세 쪽을 넘기지 않은 목록을 여러 개 보여주셨다. 도서 목록 작성에 실패한 흔적이었다. 선생님은 왜 도서 목록 작성에 실패했는가. 내 추측으로는 이렇다. 선생님은 서재를 분야별로 대강의 구역으로 나누고 저자 이름순으로 책꽂이에 책을 꽂는다. 도서 목록에서 몇몇 책은 계속 등장하지만 계속 책의 구성이 바뀌는 것을 보면, 아마도 선생님은 도서 목록을 만들다가 업무 때문에 중단했다가 다시 시작했는데 그 사이에 서재 구성이 바뀌어서 목록을 처음부터 다시 작성한 것으로 보인다. 선생님이 작성한 도서 목록에서 서지 정보를 표시하는 방식은 인터넷 서점에서 서지 정보를 표시하는 방식과 달랐다. 아마도 책장에서 책을 뽑아 책상에 쌓아두고 한 권 한 권 책제목과 저자 이름과 기타 서지 정보를 컴퓨터 키보드로 한 글자 한 글자 입력하셨을 것이다.
도서 목록 작성에 실패한 흔적을 보여준 뒤 선생님은 서재 구성에 대해 간단히 설명하셨다. 여기서부터 여기까지는 일반적인 과학 철학 일반이고, 어디는 분과와 관련된 과학 철학이고 어디는 과학이고 어디는 과학사이고 어디는 과학기술학이고 어디는 분석철학 일반이고 어디는 뭐고 등등. 서재 구성을 들으니 어떤 작업 방식으로 일을 해야 할지 감이 왔다. 구역별로 알파벳을 매기고 그 구역의 책장에 일련번호를 매긴 다음 그에 해당하는 도서 목록을 작성했다. 예를 들어 <A-2-4>라고 하면 A구역 두 번째 줄 넷째 칸에 있는 책이라는 뜻이다. 목록만 보면 어느 칸에 어떤 책이 있는지 알 수 있게 목록을 만들었다. 서지 정보는 직접 키보드로 입력하지 않고 구글로 검색한 뒤 인터넷 서점에 나오는 서지 정보를 긁어서 입력했다. 그렇게 했는데도 도서 목록 작성에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그 만큼 서재에 책이 많았다. 과학철학 분야의 웬만한 책은 다 있는 것 같았고, 사회과학의 철학과 관련된 책도 주요 도서도 거의 다 있었다.
선생님은 단행본 위주로 목록을 작성하고 책꽂이 맨 위쪽에 둔 학술지는 목록을 만들 필요가 없다고 하셨다. 학술지 중에 유난히 눈에 띠는 것이 있었다. 표지가 짙은 파란책이었는데 아마도 그런 색을 코발트색이라고 부르는 것 같다. 선생님은 내가 묻지도 않았는데 파란색 학술지를 가리키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 저기 있는 <The British Journal for the Philosophy of Science>는 내가 예전에 구입한 것인데 지금이야 얼마든지 온라인으로 구할 수 있지만 그 당시는 저렇게 종이로 된 것을 구입해야 했지. 지금이야 컴퓨터로 보고 출력할 수 있기 때문에 굳이 저걸 꺼내서 보지 않지만 그래도 버리지 않고 계속 보관하는 것은 저게 나에게 심리적인 만족감을 주기 때문이지.”
그 심리적인 만족감이 다른 학술지와 다른 색상에서 오는 것인지, 그 학술지를 사서 읽던 시절을 떠오르게 하는 것에 기인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 외의 다른 것인지는 모르겠다. 선생님은 그 파란색 학술지를 보면서 방긋 웃으셨다.
(2018.09.06.)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