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harles Coulston Gillispie (2016), The Edge of Objectivity: An Essay in the History of Scientific Ideas (Princeton University Press), pp. -.
Charles Coulston Gillispie (1960), The Edge of Objectivity: An Essay in the History of Scientific Ideas (Princeton University Press).
찰스 길리스피, 「제5장. 과학과 계몽사조」, 『객관성의 칼날』, 이필렬 옮김 (새물결, 2005), 187-238쪽. ]
[188]
계몽된 인간들은 인간 세계에서 뉴튼의 조화와 질서의 세계와는 현격한 대조를 이루는 투쟁과 무질서, 미신 등을 직시하게 됨.
이에 그들은 구시대의 질서를 버리고, 다른 시대를 만들어 갈 규범을 확립하고자 함.
인간 세상의 질서의 원리를 발견해 내고 인간 본성의 법칙을 알아내어, 그것에 따르도록 촉구함으로 계몽된 세계를 만들고자 했던 것임.
[188]
계몽사조의 과학 이데올로기는 베이컨, 데카르트, 뉴튼 등이 지닌 합리성이라는 특징을 공통분모로 함.
베이컨의 분류에 기초한 박물학, 데카르트의 이성에 근거한 형이상학, 뉴튼의 원자론적이며 대수학적인 물리학 등이 계몽사조 과학의 근간이 됨.
합리적 전통은 경험주의와 협력하고 인간을 자연에 맞추려는 과학 전통을 발전시킴.
[190]
과학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가르쳐 주지만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가르쳐 주지 않음.
가치의 영역에서 과학은 완전한 무능력함.
- “과학적 윤리란 존재하지 않는다. 부도덕한 과학이라는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앙리 푸앵카레, 『윤리와 과학』)
계몽사조는 과학의 업적을 수용하기는 하지만 도덕과 교훈이 결여된다는 사실에 불만을 느낌.
그들은 그 이상을 과학에 요구함.
* * *
볼테르 [193-]
볼테르는 해방자로서의 뉴튼을 신봉했음.
뉴튼의 과학은 데카르트의 형이상학의 독단론을 깨부수었음.
볼테르에게 자연의 객관화는 자연 상실의 비극이 아니라 사상의 해방을 의미했음.
볼테르의 좌우명 “사실로 하여금 승리하도록 하라”는 그가 형이상학으로부터의 해방을 간절히 원했음을 잘 드러냄.
로크 [197-]
로크의 『인간 오성론』(1690)에서는 인간성의 연구에 뉴튼식 과학이 접목된 모습을 볼 수 있음.
볼테르는 로크에 대해 “여기 마침내 겸허하게 혼에 대하여 기술한 현자가 나타났다”고 말함.
인간 본성에 대한 로크의 연구는 “기술” 즉 객관적인 진술적 성격을 가짐.
이 진술적 성격은 뉴튼 과학의 객관성과 맞닿음.
그와는 다른 규범적 성격의 법칙이나 원리는 물리과학과는 다른 사회과학의 특징임.
[199-]
로크는 물리학적인 논의와 추론 규칙으로 그의 사상을 펼침.
로크는 “이 논문의 목적은 [...] 지식을 탐구하고, 어떻게 정신이 그 지식에 도달하는지를 물을 뿐, 사물의 원인이나 생성 방식에 대해 묻는 것은 아니다. [...] 단지 감지할 수 있는 부분의 다양한 양, 형, 수, 구조, 운동을 발견할 뿐이다.”라고 말함으로 그의 연구 대상은 본성이 아니라 그것의 작용에 관한 지식임을 밝힘.
이는 뉴튼의 중력의 법칙이 중력의 본성이나 그 원인을 밝히는 데 있지 않고 그 작용에 대해 진술한 것이라는 점과 평행을 이룸.
[200-]
로크의 인간 본성에 관한 연구는 물리학을 모범으로 삼음.
로크는 정신을 설명하기 위해 뉴튼적 물질관에 기초함. 즉 뉴튼의 원자론을 그의 연구에 적용함.
그의 원자론적 정신에 대한 논의는 다음과 같음.
정신에는 기본적인 관념들이 있는데 이는 원자들처럼 미립자적인 관념들을 형성함.
이러한 원자적인 관념들이 입자처럼 서로 반발하거나 결합하여 새로운 관념을 형성함.
이러한 관념의 연합은 만유인력의 법칙에 대응하는 ‘지성의 운동론’에서의 법칙임.
* * *
콩디약 [206]
콩디약은 ‘과학은 곧 언어’라는 명제 아래 대단히 독자적인 언어 이론을 만듦.
그는 언어를 경험에서 유래한 기호의 인습화로 봄.
언어는 정신의 가장 고상하고 복잡한 작용의 표현임과 동시에 그 원인으로 파악한 것.
“추론의 기술은 언어를 잘 배열하는 것일 뿐”라는 그의 말에 드러나듯이, 그는 학문을 개조하는 길은 언어의 개혁에 있다고 믿음.
[206-]
뉴튼 법칙이 수학적이었던 것처럼, 콩디약은 대수학을 그의 언어 이론의 모범으로 삼음.
대수학과 언어는 기호라는 공통요소를 가짐.
그는 조직적인 명명법을 고안하여 사물과 관념, 자연과 기억을 결합하고자 함.
그렇게 하여 언어를 대수학의 기호처럼 과학을 위한 정확한 도구로 만들고자 함.
이러한 콩디약의 이론은 분류학에 크게 영향을 줌.
특히 칼 폰 린네(1707-1778)의 식물학 체계는 명확한 명명법을 그 기본으로 삼음.
그는 꽃의 형태를 사용하여 식물을 체계적으로 분류하고 명명함.
이러한 방법은 동물학으로까지 확장됨.
콩도르세(1743-1794) [208-]
콩도르세의 <인간 정신의 진보의 역사적 전망에 대한 개관>에서는 언어는 인간을 미개 상태에서 공동체로 발전시켰으며, 경험의 공유가 인간 사회를 진보시킨 것이라고 말함.
무지, 미신, 광신 등에 의해 무지에 빠진 인민들은 권력자들에게 의존적이 되었었음.
모든 역사는 이 무지 극복의 역사임.
“정치와 윤리의 모든 오류에는 철학적 오류에 근거해 있고, 더 나아가서 이것들은 과학적 오류와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모든 종교 체계와 초-자연적인 방종는 모두 자연 법칙에 대한 무지에 근거한다고 말함.
과학적 방법을 사용하여 그러한 오류를 시정할 수 있다면 이것은 무지를 극복할 수 있으며, 이 무지의 극복으로 인간의 완성 가능성에 다가갈 수 있다고 콩도르세는 믿었음.
디드로의 백과전서 [209-]
놀랍게도 과학은 산업혁명을 일으킨 복잡한 기술 혁신과 거의 관계가 없었음.
오히려 18세기에 이론 과학이 산업에 제공한 것은 과학적 방법이었음.
뉴튼의 과학적 방법은 무엇이었는가?
뉴튼은 모든 측정가능한 요소들을 분석하고 분해한 후, 이 요소들 사이의 상호 관계를 수학적으로 표현함.
디드로의 평생의 업적인 <백과전서>(1751-1772)의 기술에 이와 같은 방법론이 적용됨.
이 책의 부제는 “과학-기술-직종에 대한 분석 사전”인데, 이 책은 그 자체가 산업의 박물학이라 할 만함.
이 책에서는 산업의 여러 요소들을 분해하고 다시 재조립하며 그에 대한 정확한 명명법을 적용하는 등의 과학적 방법론이 사용되었던 것.
계몽사조의 낭만주의와 뉴튼 과학의 대립 [214-]
낭만주의는 뉴튼 과학의 반대선상에 놓여있음.
낭만주의 정조가 계몽사조의 한 갈래임을 생각해 볼 때 이는 아이러니함.
그러나 낭만주의의 기본 정신 즉 인간성의 회복을 생각해 볼 때 뉴튼 철학에 대한 반발은 당연한 귀결이었음.
괴테는 낭만주의 최대의 정신이라 불림.
그는 문학적 지성을 널리 알려져 있지만 과학에 대한 저술을 남겼음.
이러한 과학 저술에서 그는 뉴튼주의에 대해 전면적이며 체계적인 반발을 보여줌.
그 외에 루소, 그리고 디드로 등이 뉴튼의 수학적인 물리학이 보여주는 인간소외의 정신, 몰인간적인 자연관에 대한 심한 혐오를 느끼며 뉴튼과는 다른 자연상을 제시함.
그러나 그러한 낭만주의의 과학 정서는 주관적인 성격의 것이었음.
그것은 객관성이 결여되어서 과학의 주류로 자리 잡지 못하는, 시대의 흐름에서 벗어나는 것이 됨.
루소 [216-]
루소는 자신의 논문 “과학과 기술의 진보는 도덕을 부패시켰는가, 향상시켰는가?”에서 과학은 인간성과 도덕성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고 주장함.
그것은 뉴튼적인 과학이 인간성의 회복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는 것
루소의 가슴에 불타는 낭만주의적 정신은 인간을 소외한 객관성을 지닌 과학이나, 또는 그러한 정신, 그러한 과학자나 지성인에 대항하는 것이었음.
디드로 [217-]
디드로의 <백과전서>는 뉴튼의 과학적 방법의 틀로 저술되었지만 그 안에는 낭만주의적 정조가 담겨 있음.
즉 그 컨텐츠만큼은 낭만주의적임.
또한 <숙명론자 자크>에서 디드로는 “물리적 세계와 도덕적 세계의 구별이 [...] 무의미한” 그런 자연철학을 제시함.
디드로 과학의 대상은 자연에서 생겨나는 덕이며, 질서의 원천은 전-우주적인 인격임.
그것은 스토아 학파적인 것임.
스토아주의자들은 자연으로부터 행위의 법칙을 찾아내며, 우주와 인격체 간의 교감과 조화를 중요시함.
뉴튼의 물리학의 객관성과는 다른 주관적으로의 회귀의 모습이 디드로의 자연 과학 철학에 나타남.
데카르트는 자연을 알기 위해 자기 자신을 연구함.
그러나 디드로는 자기 자신 즉 인간을 알기 위해 자연을 연구함.
디드로에게 과학의 무기는 수학적 추상이 아니라 도덕적 통찰이었음.
* * *
브넬 [222-]
브넬은 <백과전서>의 화학 항목을 저술함.
브넬에 의하면 그 당시 시작된 화학은 디드로의 자연관을 닮은 스토아적인 것이었음.
그것은 자연과 교감을 중요시하는 공감적인 화학임.
그러한 화학은 뉴튼적 물리학에 의해 속성이 박탈된 물체에 그 속성을 회복시켜주려 함.
화학자들은 화합과 분리 등의 여러 현상들에서 “자연의 생명”을 감지하려 함.
생명이 배제된 뉴튼적 자연의 빈곤을 다시금 충만케하기 위해서임.
* * *
괴테 [229-]
괴테는 분석, 분해, 분류 등 원자론적 방식에 본능적인 혐오감을 가졌음.
그의 정신은 결합, 동화, 조화였음.
괴테에게 린네의 식물학은 형태에 따른 몰-인간적인 분류의 원리일 뿐이었음.
그것은 그의 사상에 맞지 않았음.
괴테는 박물학자 바취의 체계를 좋아했는데 바취의 방법은 존재의 연쇄 속의 진보에 대응하는 형상에 따라 식물을 배열한 것임.
[232-]
괴테가 뉴튼의 <광학>에 반대하는 색채 이론을 주장했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임.
뉴튼의 빛의 분석은 원자론적인 것. 즉 단일한 것으로 여겨지던 빛을 다양한 광선으로 분해한 것.
물론 이것은 프리즘을 통과시킴으로 얻게 된 결론
그러나 괴테는 “본능적으로” 뉴튼의 색채론이 틀렸다고 생각함.
괴테의 기본 사상은 분석이 아니라 조화였기 때문임.
괴테는 빛의 가장자리가 어둠을 두들길 때 색채가 나타난다고 생각함.
색채는 빛과 어두움이라는 양극 사이의 긴장을 나타내는 것.
괴테에게 빛은 실재의 흐름이고, 내재하는 신성의 현현이며, 영혼과 마찬가지로 분할할 수 없는 것.
암흑은 고뇌이고, 비-존재며, 죽음이었음.
이 사이의 긴장이 색채로 자각되는 것이었음.
“색채는 빛의 고뇌이다”라는 그의 말은 시적인 아름다움을 가짐.
그러나 이 진술은 괴테의 과학적 진술이기도 함.
[232]
뉴튼의 방법은 자연을 수학에 의하여 추상화하고, 망원경, 프리즘, 거울 등의 도구로 자연을 괴롭힘으로써, 결국 자연을 핀에 꽂힌 나비처럼 숨을 거두게 함.
괴테는 현상을 있는 그대로- 넓은 하늘 밑에서, 번거롭고 인위적인 기교도 부리지 않고, 일생동안 공감적인 지각으로써 관찰하려고 함.
그것이 괴테의 낭만주의적 정서였음.
[233-]
괴테의 과학은 모두 그의 개성과 시에 밀접하게 연관됨.
베이어드 테일러: “그의 지성은 인간과 자연, 즉 개인과 종족과 세계를 하나의 일관되고 조화적인 조직으로 결합하는데 성공했다. 그런데 거기에서는 시, 산, 꽃, 조상이 모두 동일한 성장 법칙을 따랐다.”
시인 괴테나 과학자 괴테에게서 이 목표는 바뀐 적이 없었음.
그의 과학에 대한 주관성은 바로 이러한 그의 정서의 결과물임.
[234-]
괴테와 디드로의 뉴튼 과학에 대한 공격은 잘못된 흐름이었음.
역사적으로 볼 때 과학은 자연의 통일과 현상의 다양성 사이에서 시계추처럼 왔다 갔다 했으며, 이 둘 사이의 조화를 위해 오랫동안 나름의 방식으로 일종의 주고받는 대화를 지속했음.
그러나 낭만주의 정조를 바탕으로 한 이러한 흐름은 분명히 잘못된 방향 전환임.
낭만주의와 객관적 과학 [236-]
낭만주의 정조의 뿌리는 인간성, 도덕성임.
이에 대한 열망은 물리학에 대한 반역의 동기가 됨.
뉴튼 물리학은 자연을 객관화했음.
뉴튼 물리학은 계량적, 수량적 과학임.
낭만주의는 인간과 자연이 합일할 수 있는 과학을 지키고자 이에 대항함.
- 낭만주의는 과학의 중심에다 물리학 대신 생물학을 놓으려고 함.
낭만주의는 질서의 모범으로서 기계론 대신에 유기체를 놓으려고 함.
그것은 언제나 과학이 자연에서 발견한 것 이상을 자연에게서 기대했음.
[237]
낭만주의는 디드로의 자연주의적이고 도덕적인 과학, 괴테의 자연의 인격, 워즈워드의 시, 알프레드 노드 화이트헤드의 철학에서 가장 고상하게 꽃을 피움.
또한 과학에서 질적이고 심미적인 자연 인식을 발견하려는 사람들의 정신을 모두 고취하는 면에 기여함.
그러나 그러한 길은 과학의 길은 될 수 없음.
다만 예술이나 역사주의의 길은 될 수 있을 것임.
(2024.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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