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료 대학원생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내가 “재승박덕”이라는 단어를 썼다. 동료 대학원생이 물었다.
- 대학원생: “그런데 재승박덕이 무슨 말이죠?”
- 나: “재주가 뛰어나지만 덕이 없다는 말입니다.”
- 대학원생: “덕이 무슨 뜻이죠? 탁월함 같은 건가요?”
한문을 잘 모르더라도 한국어가 모국어인 사람들은 ‘덕’이라는 말을 들으면 대강 어떠한 이미지가 떠오르기 마련이다. 하지만 동료 대학원생은 중세철학 전공자다. 고대철학이나 중세철학을 전공하는 사람들은 어느 시점부터 덕을 德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arete의 번역어로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 나: “여기서 덕은 arete가 아니고 동아시아적 맥락의 덕이죠.”
- 대학원생: “아, 도덕적 탁월성이네요!”
고대철학 선생님이나 중세철학 선생님들 중에는 한국어를 사용하기는 하는데 어순만 한국어인 분들이 있다고 한다. 그 선생님들이 사용하는 단어는 한국어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고대 그리스어나 라틴어의 번역어라는 것이다. 일종의 파일 덮어쓰기와 비슷하다.
이러한 덮어쓰기 때문에 수업 중에 학부생들이 혼란에 빠지는 일도 있다. 선생님들은 나름대로 쉽게 설명하려고 덕, 지혜, 사랑, 용기 같은 단어가 일상생활에서 어떠한 뜻으로 사용되는지 예를 들어 설명한다. 그런데도 학생들이 혼란에 빠지는 이유는, 그 일상생활이 21세기 한국인의 일상생활이 아니라 기원전 5세기 그리스인의 일상생활이기 때문이다.
(2016.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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