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Etienne Gilson (1949), Being and Some Philosophers (Toronto: The Pontifical Institute of Mediaeval Studies), pp. vii-xi.
E. 질송 지음, 「지은이의 말」, 『존재란 무엇인가: 존재론의 쟁점과 그 전개과정』, 정은해 옮김 (서광사, 1992), 5-12쪽. ]
[5쪽]
프래그마티즘에서는 추상적인 철학적 개념들을 정의하는 일에는 시간을 낭비하지 않는다고 하는데, 윌리엄 제임스는 그의 저작인 『철학과 그 비판』에서 적어도 한 번은 “정의의 문제 때문에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 불가피하다고 했다.
[5-6쪽]
“분과학문이 독립하여 철학이라는 이름이 제한됨에 따라, 철학은 점점 더 배타적으로 넓은 적용범위를 같게 됨.
보통 스콜라적 교과서에서 철학은 “자연이성이 도달할수 있는 지식인 한에서, 사물들의 궁극적 원인들에 의한 사물 일반의 지식”으로 정의되는데, 이는 철학철 목표하는 것은 우주를 설명하는 것이지 우주의 세부사항을 기술하는 것이 아님을 의미함.
어떤 것에 관한 하나의 견해가 철학적이려면, 그 견해가 광범위하면서 다른 견해와 연계되어야 하고 궁극적이고 모든 것을 포괄하는 원리들을 사용해야 함.
듀이 교수가, 철학은 경계를 구분할 수 있는 하나의 학문이라기보다는 어떠한 태도, 목적, 지성과 의지가 결합된 기질을 표현한다고 말한 것은, 이러한 모든 철학의 체질을 묘사한 것.
[6-7쪽]
제임스가 파악한 것
고전적인 형이상학 개념: 궁극적 원인에 의한 사물 일반의 지식
→ 그 원인이 사물이나 존재가 아닌, 얼마나 “일반적”인가에 따라 그 정도만큼 궁극적인 것
즉, 사물에서 처음인 것에 관한 학(내적 일반성)
→ 사유 속에서 가장 보편적인 것에 관한 학(범위상의 광범성)
그런데 ‘광범성’은 ‘일반성’과 꼭 같지 않다. 사물들에 관한 어떠한 광범위한 견해도 꼭 같이 광범위한 견해만큼 철학적이다.
일반성: 사물에 관계, 광범성: 마음의 한 속성
인식의 일반성: 특수한 지식이 지니는 일반화에 대한 적합성에 의존(지성)
개관함의 광범성: 실재에 대한 인식주관의 태도(의지)
→ 지성과 의지의 문제
[7~8쪽]
철학적 영역들 안에서, 어떤 철학자가 스스로 옳다고 확신하는 한, 그는 확실히 잘못한 것.
그 이유는 철학적 지식의 본질이 “어떤 태도, 목적, 그리고 (지성과 의지가 결합된) 기질”을 표현한 것에 불과하기 때문.
그래서 그러한 사람을 자기도취자, 무례한 사람, 쉽게 말해 광신자로 여김.
[8-9쪽]
유감스럽게도 독단적 철학자는 광신자가 되기 쉬움.
철학자들은 자신들이 가르치는 참됨을 믿는다고 하지만, 그들은 철학적 진리를 ‘믿기’ 때문에 그것을 ‘알지’ 못함.
그래서 그들은 철학적인 반대가 부분적 참과 전체적 참 사이에서가 아니라 참과 오류 사이에서 필연적으로 생기는 듯 반대함.
그러나 우선해야 하는 것은 이해하는 것.
철학자들을 충실하게 이해하는 것은 그들의 고유한 한계 내에서 아는 것이기 때문에 그들을 거부할 이유가 없음.
철학의 기원에서 발견해야 할 유일한 의지는 알려고 하는 의지.
이는 어떤 철학자에게 있어서 그 자신의 가장 중요한 철학적 의지가(??) 되는지 설명함.
[9쪽]
우리의 유일한 문제는, 우리가 사람으로서 불가오류적으로 아는 것을, 왜 철학자들은 그렇게 자주 간과하는지 아는 일임.
이 책은 철학책이고(철학사가 아님), 독단적인 철학책임.
[9-11쪽]
이 책은 역사책이 아닌 철학책임.
역사의 유일한 과제는 이해하거나 이해하게끔 하는 것인데, 철학은 선택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
정확히 말해서, 이 책은 사유를 숙고하거나 직접적으로 실제로 아는 게 아니라, 사유와 실재의 관계를 아는 것으로 이루어짐.
이러한 철학의 대상은 과거도 아니고 미래도 아닌데, 그 대상은 지금 ‘있고’, 그것은 ‘존재’이며, 존재에 관한 진리는 입증할 수 없고 단지 보여지거나 간과될 뿐이기 때문.
질송은 개인적 진리 같은 것이 있는 게 아니라 진리에 대한 접근이 개인적인 접근이라는 윌리엄 제임스와 존 듀이의 주장에 동의함.
[11-12쪽]
역사적인 이유 때문에 이전에 가르쳤으나 이 책의 철학적 목적에 불필요하고 무관한 것은 제거했음.
어떤 철학자들의 표현 자체보다는 그들의 궁극적 의도를 진술하고자 했음.
(2018.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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