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6/14

인문학이 사치재인 것이 왜 문제인가

   

한림대 경제학과 김인규 교수는 <동아일보>에 투고한 칼럼에서 인문학은 “사치재(luxuries)”라는 점에 착안하여 학제 개편을 추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인문계 정원을 최소한으로 축소하는 대신 이공계 학생을 포함한 전교생의 인문학 교양 교육을 강화”하고 그 “학생들이 중장년층이 됐을 때 인문학을 다시 찾도록 만들”며 “현재 중장년층의 인문학 수요에 부응해 새로운 프로그램을 적극적으로 개발”해야 한다는 것이다. 김인규 교수의 칼럼이 실린지 1주일 뒤에 같은 신문에 반론 글이 실렸다. 유감스럽게도, 반론 글은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였다.

반론자는 스티브 잡스와 마크 저커버그가 컴퓨터를 이해해서 성공한 것이 아니라 사용자를 이해해서 성공했다고 주장한다.

첫째, 김 교수는 기업들의 이공계, 상경계 출신 선호를 설명하면서 스티브 잡스와 마크 저커버그가 인문학 덕분에 성공한 것이 아니라 컴퓨터에 대한 이해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그러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 잡스가 [...] 워즈니악과 함께 애플을 경영하던 시절, 기술적인 부분을 다룬 사람은 워즈니악이었지 잡스가 아니었다. 하지만 [...] 잡스가 애플을 떠나고 나서 어떻게 되었는가?

중요한 것은 ‘사용자에 대한 이해’이다. 이는 컴퓨터를 공부한다고 저절로 나오는 것이 아니다. 백 번 양보해서 잡스와 저커버그가 ‘천재’라고 가정하더라도 천재들과의 경쟁에서 취할 전략은 ‘사용자에 대한 이해’를 통한 번뜩이는 아이디어여야 한다. 이는 인문학 없이 나올 수 없다. [...]

컴퓨터를 공부한다고 ‘사용자에 대한 이해’가 저절로 나오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면 인문학을 공부하면 사용자에 대한 이해가 저절로 나오는가? 그것도 아닌 것 같다. 나는 학부도 문과대를 다녔는데, 사용자에 대한 이해가 있을 법한 학생은 매우 드물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인문대에서 사용자에 대한 이해를 가진 학생들을 배출했다면 애초에 학제 개편 같은 이야기는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백 번 양보해서 인문학을 공부하는 것이 사용자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하자. 인문학을 얼마만큼 공부해야 사용자를 이해할 수 있을까. 반드시 전공 수업을 들어야 하는가, 아니면 교양 수업을 많이 듣는 것으로는 보완할 수 있는가? 문학, 사학, 철학 중 어느 학문을 위주로 공부해야 인간을 잘 이해하게 되는가, 아무거나 많이 배우면 인간을 이해하게 되는가? 경제학이든 물리학이든 그 과에서 어떤 과목들을 어느 정도 배우면 되는지 어떤 작업을 할 수 있는지 견적이 나오는데, 인문학을 배워서 인간을 이해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견적이 안 나온다. 왜 그런가. 애초부터 개소리라서 그렇다.

인문학 말고도 인간을 탐구하는 학문은 많다. 동물행동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동물의 행동을 연구하여 진화의 연장선상에 있는 인간의 행동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동물행동학은 인문학이 아니다. 인지 심리를 연구하는 사람들도 인간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심리학도 인문학이 아니다. 게임 이론은 다양한 분야에서 응용되며 인간의 행동을 연구하는 데 많이 쓰인다. 경제학 같은 학문들도 인문학이 아니다. 컴퓨터 공학도 인지과학의 한 분과다. 웬만한 학문들은 인간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사용자를 이해하려면 인문학을 해야 한다는 말은 얼마나 공허한가.

반론자의 두 번째 반론은 아예 틀렸다.

둘째, 김 교수는 ‘인문학은 사치재’라고 규정하며 그 수요자를 소득이 높은 중장년층으로 본다. 이것은 하나의 결과를 통해 원인을 규정해버리는 것이다. 소득수준이 높은 사람들이 찾는다는 점에서는 사치재로 보일 수 있지만 이는 “왜 그들이 인문학을 찾는가?”라는 질문에는 아무런 답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소득수준이 높은 중장년층들이 인문학을 찾는 이유는, 그것이 사치재이기 때문이다”라는 무의미한 결론을 내버린 꼴이다.

인문학을 찾는 이유는 사치재이기 때문이 아니다. 경제적으로 풍요로움에도 불구하고 그 풍요가 인생을 채워주지 못하기 때문에 인문학을 통해 채우려는 것이다. 한국이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으로 부상했음에도 구성원들의 행복까지는 감싸 안지 못했던 것에 대한 반응이다. 그런 점에서 인문학은 사치재가 아니고 ‘생활필수품’이다.

두 번째 반론은 반론자가 사치재가 무엇인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재화는 정상재와 열등재로 나뉜다. 정상재는 소득이 증가할 때 소비도 증가하는 재화이고 열등재는 소득이 증가할 때 소비가 감소하는 재화이다. 정상재는 다시 필수재와 사치재로 나뉜다. 필수재는 소득이 1만큼 증가할 때 소비가 1 이하로 증가하는 재화(소득 탄력성 < 1)이고, 사치재는 소득이 1만큼 증가할 때 소비가 1 이상으로 증가하는 재화(소득 탄력성 > 1)이다. 인문학은 사치재가 맞다. 인문학이 사치재라는 말은 인문학이 쓸모없다는 말이 아니라 수요의 소득 탄력성이 1 이상이라는 말이다.

사치재가 무슨 말인지도 모르는 반론자는 “소득이 높은 중장년층이 [...] 인문학을 찾는 이유는 사치재이기 때문이 아니라 [...] 경제적인 풍요가 인생을 채워주지 못하기 때문에 인문학을 통해 채우려는 것”이라고 진단한다. 무슨 근거로 이런 진단을 내리는 건지 모르겠다. 사회학과에서 그러던가? 중장년층들이 인문학을 소비하는 이유는 다 제각각일 것이다. 재미로 배우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지적 호기심 때문에 접근할 수도 있고, 원래는 별 관심이 없었는데 주위 사람들 따라서 접근할 수도 있다. 반론자는 무슨 근거로 경제적 풍요가 인생을 채워주지 못해서 인문학으로 채운다고 단언하는가? 또한, 김인규 교수가 용잡이 기술이라며 비웃는 인문학은 힐링 전도사들이 인생 운운하며 팔아먹는 것인데 반론자가 반론이라고 하는 제시하는 인문학이라는 것도 결국 멍청하게 인생 타령이나 하는 것에 불과하다.

대학 학제 개편에 대응하려면 인문학의 개인적인 효용이 아니라 사회적 효용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개인적 효용이란 개인들이 각자 알아서 소비하면 되는 것이라서 굳이 정부에서 신경 쓸 필요가 없다. 그렇다면 인문학의 사회적 효용은 무엇인가.

우선, 인문학은 사치재가 맞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역사적으로 봐도 인문학은 사치재다. 당 태종이 인도에서 불경을 가져와 대대적인 번역 사업을 벌인 것도 그렇고, 청의 건륭제가 사고전서를 펴낸 것도 그렇다. 메디치가에서 학자와 예술가를 후원한 것도 그렇고, 유럽 왕실들이 왕립학회를 설립한 것도 그렇다. 인문학은 인류 역사 내내 사치재였다. 그래서 무엇이 문제인가. 인문학 등 순수 학문에 투자를 하는 나라는 대체로 소득이 일정 수준 이상이고 다른 나라보다 꽤나 잘 나가는 나라다. 오늘날 순수 학문에 가장 투자를 많이 하는 나라는 미국, 유럽 등 선진국이다. 넓게 보자면 스위스와 프랑스 국경 사이에 있는 입자가속기도 사치재다. 그래서 뭐가 문제인가.

사치재는 인간이 단순히 먹고 자는 것 이상의 것을 요구하는 존재라는 것을 보여준다. 사치재들은 대부분 개인이나 집단의 ‘있어 보임’을 위해 소비된다. ‘있어 보임’은 인간이 짐승과 다른 존재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고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인간의 존엄, 자존심, 체면, 이런 것이 다 ‘있어 보임’과 관련된다. 인문학은 사치재다. 그래서 뭐가 문제인가.

한 나라의 인문학 수준은 그 나라의 ‘있어 보임’에 기여한다. 학제 개편에서도 이 점을 고려해야 한다. 한 대학의 인문학 수준은 그 대학의 ‘있어 보임’에 비례한다. 있어 보이는 나라에는 인문학이 있어야 하듯 있어 보이는 대학에도 인문학이 있어야 한다. 인문학을 정리하는 나라는 얼마나 형편이 궁한 것이며 인문학을 정리하는 나라는 또한 얼마나 형편이 궁한 것인가.

사치재가 뭔지도 모르는 주제에, 인문학이 필수품이라며 잡스 타령, 주커버그 타령 하는 사람들 때문에 멀쩡한 인문학 전공자들의 위신까지 덩달아 떨어진다. 앞에서 대놓고 말하지 않아서 그렇지 자기 학교 인문대 학생들 수준 떨어진다고 궁시렁거리는 교수들이 대학 곳곳에 숨어있다. 아마도 김인규 교수도 그런 부류의 사람이 아닐까 싶다. 많은 사람들이 인문학을 불신하는 원인 중 하나는 수준 미달인 인문학 전공자 때문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 뱀발:

아래의 글은 어디에 나오는 글일지 짐작해보자.

학문이 내포하는 난해한 요소는 지난 모든 시대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무지한 사람들에게 감명을 주거나 강제력을 발휘할 수 있는 아주 매력적이고 효과적인 요소로 작용한다. [...]

얼마 전부터 대학의 교과목과 그 내용이 상당히 바뀌었다. 이러한 변화는 주로 인문학(전통적인 교양, 인격, 취미, 이상형을 함양하는 학문분야)을 시민의식과 산업 효율성을 높이는 실용적인 학문으로 대체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졌다. 바꾸어 말하면, 효율성을 향상시키는 지식분야가 산업능률을 저하시키는 지식분야에 맞서서 점차 세력을 확대해왔다. [...]

인문학의 대변자들이 새로운 학문에 내리는 경멸적인 판단이 아무리 타당하다고 해도, 그러한 타당성이나 주장은 당면한 문제와 무관하다. 당면한 문제는 이러한 학문분야들이 현대 산업 환경에서 효과적으로 집단생활을 하는 데 도움이 되느냐 방해가 되느냐 하는 것이다. 따라서 문제는 예술적인 것이 아니라 경제적인 것이다. [...]

고등학문기관들이 맹목적일 정도로 편애하는 고전들과 그것이 교육체계에서 차지하는 특권적인 위상은 새로운 지식세대의 지적 태도를 규정하고 그 세대의 경제적 효율을 저하시키는 작용을 한다. 고전은 고대적인 이상형의 남자를 칭찬하고 지식을 명예로운 것과 불명예스러운 것으로 구별하는 차별의식을 주입하여 이러한 역할을 수행한다. 이를 위하여 두 가지 방법이 동원된다.

(1) 초심자가 순수 학문에 대비되는 실용학문을 혐오하는 습관을 갖도록 조장하여, 통상적으로 산업적, 사회적 이익을 전혀 낳지 않는 지성만 발휘하여 기쁨을 느낄 수 있다는 신념에 충실한 취미를 형성하게 한다.

(2) 학자에게 필요한 모든 방면의 학문을 가르쳐 실용적인 분야의 지식을 제외한 완전히 비실용적인 지식을 습득하는 데 그의 시간과 노력을 소비하게 한다. [...]

고전적인 학문이 그것을 배우는 사람의 노동자적 적성을 교란하는 작용을 한다는 사실은, 격조 높은 이상을 추구하는 정신을 중시하고 노동의 정신을 경시하는 사람들에게는 대수롭지 않게 여겨질 것이 분명하다. [...] 흔히 고전과 인문학에 관한 지식을 결여하면 불온한 학식으로 취급받을 수 있다는 생각은, 일반 학생들이 과시용으로 그러한 지식을 습득하느라 시간과 노력을 낭비하게 만든다. [...] 고전에 관한 지식은 다른 어떤 방면의 지식보다도 유한계급의 학문적 과시욕을 만족시키는 데 유용하기 때문에 명성을 획득하는 데에도 그만큼 유력한 수단이 된다.

<한국경제신문>이나 <조선일보>에 나오는 글이 아니다. 소스타인 베블런의 『유한계급론』 14장 “금력 과시 문화를 표현하는 고등학문”에 나오는 글이다. 자본주의를 비판하며 인문학의 가치를 역설하는 사람 중에 베블런을 인용하는 사람들이 간혹 가다 있는데 그들은 『유한계급론』을 읽지도 않고 아는 척 하는 것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 링크(1): [동아일보] 청춘이여, 인문학 힐링 전도사에게 속지 마라 / 김인규

( http://news.donga.com/3/all/20150228/69852847/1 )

* 링크(2): [동아일보] 청춘이여, 미래는 인문학에 있다 / 김희원

( http://news.donga.com/3/04/20150303/69911821/1 )

(2015.0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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