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1/04

토론 수업에서는 어떤 교재를 써야 할까?



고등학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느라 캐시 오닐의 『대량살상 수학무기』라는 책을 읽었다. 다소 실망스러운 책이었다. 마치 그 책이 알고리듬이 민주주의에 어떠한 악영향을 끼치는지에 대한 통찰을 던진 것처럼 설레발 치는 놈들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하여간 뻑 하면 호들갑 떠는 놈들의 말은 믿을 게 못 된다. 그 책에서 몇 가지 사례를 참고할 수는 있겠으나, 그게 전부다. 어떤 분야에서 어떤 것을 하니 어떤 부작용이 생기더라 하는 수준의 이야기일 뿐이다. 그게 알고리듬이 어떻게 작동해서 그러한 결과가 나오는지도 구체적으로 설명한 것도 아니었고, 그러한 부작용이 나타나는 것이 원리적으로 그렇게 생길 수밖에 없는 것인지, 아니면 현재의 기술적인 한계 때문에 일시적으로 그러는 것인지도 밝히지 않았다. 저자가 업무상 기밀유지 의무 때문에 구체적인 부분을 적을 수 없었다고 믿고 싶지만, 책 곳곳에 불쑥불쑥 나오는 감정적인 표현이나 밀도 낮은 서술을 보면 저자가 그냥 책을 대충 쓴 게 아닌지 의심할 수밖에 없다.

문제는 내가 그 책을 가지고 고등학생 대상 토론 수업을 해야 했다는 것이다. 알고리듬이 장밋빛 미래를 보장하기만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까지는 알겠다. 그래서 어쩌라고? 토론 수업을 하려면 어떤 사안과 관련하여 찬반 의견이 나뉘든지, 해결 방안을 모색하든지 해야 하는데, 이 책은 알고리듬을 사용했을 때 생긴 부작용이나 피상적으로 모아놓은 것이라서 할 수 있는 게 마땅치 않았다. 한 번에 두 시간씩 2회에 걸쳐 총 네 시간 동안 했는데, 그 중 해설 강의가 20분 정도였고 나머지는 모두 토론이었다. 어쨌든 시간을 때우기는 때웠다.

내가 아직 학부 수업은 해본 적이 없고 고등학교 아르바이트만 해봐서 자신 있게 말하기는 어려운 입장이지만, 그래도 얄팍한 경험에 근거해서 말해보자면, 책 한 권 읽히고 토론 수업을 하라는 건 말이 안 되는 것 같다. 그 책이 <Contemporary Debates> 시리즈라면 모르겠으나, 저자 한 사람이 자기 입장을 정리한 교양서적을 두고 토론 수업을 시키면 학생들이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다. 찬반 토론을 시키기도 어렵고, 가능한 다른 해결책을 모색하게 하기도 어렵다. 아무리 책이 허술해도 웬만하면 저자는 고등학생보다는 압도적으로 많이 안다. 저자가 최대한 일관성 있게 내용을 정리해놓았는데, 그것을 두고 고등학생이 반대 의견을 내세우겠는가, 대안을 내세우겠는가? 책 한 권 읽히고 토론 수업 시켜봐야 다양한 의견이 나오기 힘들다.

학생들이 어떤 사안을 다양한 관점에서 보려면 한 주제에 대해 복수의 저자가 쓴 글을 가지고 토론시켜야 한다. 앞서 말한 <Contemporary Debates> 시리즈는 아예 한 주제를 놓고 상반되는 견해를 가진 사람 중 제일 잘 나가는 사람을 뽑아서 논쟁을 시킨다. 가령, 히치콕이 편집한 『Contemporary Debates in the Philosophy of Science』(2004)에서 다룬 주제 중에는 “사회과학에 법칙이 있는가?”도 있는데, 여기에 해롤드 킨케이드는 「사회과학에 법칙은 있다」(There are Laws in the Social Sciences)는 논문을 실었고, 존 T. 로버츠는 「사회과학에 법칙은 없다」(There are no Laws in the Social Sciences)는 논문을 실었다.

문제는 <Contemporary Debates> 시리즈 같은 책을 토론 수업 교재로 사용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힘들다는 점이다. 학부생들도 읽기 어려운 것을 고등학생들이 읽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예전에 한 사안에 관한 상반된 견해를 다룬 글을 실은 논술 교재가 있었던 것 같은데 요새도 그런 책이 나오는지는 모르겠다. 그러한 책이 나온다고 해도, 비교적 최신 주제에 대하여 얼마나 밀도 있게 다룰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그렇다고 자기 업무하기에도 바쁜 교사들보고 토론 수업 설계를 하라고 하는 것도 힘들 것이다. 그러니, 현재로서는 교양서적 한 권 읽고 토론 수업하는 것 말고는 뾰족한 수가 없을 것이다.

(2023.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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