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태균, 『원형과 변용: 한국 경제개발계획의 기원』,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13. ]
1. 현상 유지: 1950년대 미국의 대아시아 정책
1) 경제협조처의 대한원조
2) 새로운 패션: 그러나 새롭지 않은
3) 아시아극동경제위원회의 활동과 미국의 소극적 정책
2. 저개발국 근대화를 통한 봉쇄정책
1) 로스토우의 등장
2) 로스토우의 근대화론
3. 1960년대 초 미국의 저 개발국 정책 변화
1) 로스토우 이론의 확산
2) 로스토우에 근거한 새로운 대외정책
3) 대일정책의 변화
1. 현상 유지: 1950년대 미국의 대아시아 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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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극동경제위원회(Economic Commission for Asia and the Far East, ECAFE)와 영연방 국가들이 주축이 된 콜롬보 플랜(Colombo Plan)
1) 경제협조처의 대한원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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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전후 아시아의 경제복구를 위한 유엔의 산하조직으로서 창설된 아시아극동경제위원회가 창설
1951년에 결성된 콜롬보 플랜도 경제개발을 위한 기구로서 역할했지만 서아시아의 영연방 국가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비-공식 기구였기 때문에 아시아극동경제위원회와는 위상에서 큰 차이가 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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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극동경제위원회보다는 한국이 미국의 후진국 원조 정책의 변화에 큰 영향을 받았음.
미국의 대한원조가 이데올로기적 냉전의 성격을 갖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미국의 경제적 이해관계와도 연관되어 있었음.
114-
미국은 후진국에 대한 경제개발계획이 미국과 유럽 선진국의 경제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보고 대한원조를 ‘구호’ 중심의 원조에서 경제 ‘부흥’ 원조로 바꾸고자 함.
경제협조처는 단순한 소비재 원조의 차원을 넘어 기본적인 공업시설 부흥계획 등 자본재 원조를 중점으로 하여 1억 5천 달러 상당의 원조를 제공하고자 함.
국무부가 3개년 간에 걸쳐 원조를 제공하고자 계획함.
116-
1950년 한국 전쟁이 발발함에 따라 미국의 군사비가 확대되면서 한국은 물론이고 여타 후진국에 대한 ECA 계획이나 포인트 포 계획이 모두 무산됨.
2) 새로운 패션: 그러나 새롭지 않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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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에 이르러서는 모든 미국의 대외원조가 군사원조의 성격을 강하게 띤 상호안전법(Mutual Security Act; MSA) 아래로 통합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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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 모든 대외원조가 기본적으로 군사적 안보적인 목적에서 이루어지다 보니 미국의 저개발국 원조는 이전보다 적극적이지 못했고, 가장 거대한 규모의 원조를 받고 있었던 한국의 경우에도 1959년까지는 모든 대외원조가 유엔군 사령부에 의해서 관장되었음.
119
일부 연구에서는 1950년대 중반을 기점으로 미국의 원조가 군사 중심에서 경제 기술 중심으로 변화하였고 보고 있지만, 아이젠하워 행정부에서 나온 경제정책과 관련된 문서들을 살펴보면 1950년대 전반기와 후반기 사이에 별다른 변화가 없음.
저개발국의 경제 개발이 필요하다는 내용이 1950년대 후반 일부 문서에서 나타나지만, 국가 재정보다는 민간자본을 이용한 원조를 강조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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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직속의 랜달위원회는 1953년의 보고서에서 아시아에 대한 원조의 축소와 민간 자본의 투자 촉진을 권고
이후의 국가안보회의 문서 국가자문회의 문서 등에서도 비슷한 주장이 반복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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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러한 정책은 현실적이지는 못했음.
식민지에서 해방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아시아 국가들은 해외 자본이 자신들의 경제를 다시 한번 예속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여 이에 대한 경계를 풀지 않았음.
미국의 개인투자자들 입장에서도 저개발국은 불안정해 보였기 때문에 실제 민간자본의 도입은 원활하지 않았음.
3) 아시아극동경제위원회의 활동과 미국의 소극적 정책
2. 저개발국 근대화를 통한 봉쇄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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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 아이젠하워 행정부가 지향한 뉴룩정책은 재정지출을 최소화하고자 하였기 때문에 아시아 지역의 경제성장을 위한 지원에 상당히 소극적이었음.
뉴룩 정책이 ‘현상유지’를 하는 정도에 그쳤고 공산주의의 영향력을 적극적으로 축소시키는 데는 실패함.
1) 로스토우의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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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 미국의 저개발국가에 대한 정책을 비판하는 주장
비판(1): 후진국에 대한 무상원조가 미국의 재정적자 문제를 심화시키고 있다는 점
비판(2): 미국을 비롯한 서구사회의 저개발국각에 대한 인식을 총체적으로 바꾸어야 하며, 이를 통해 미국의 저개발국가에 대한 정책의 내용과 목표가 모두 새롭게 규정되어야 한다는 것
이는 1960년대 정책 변화와 관련하여 더 중요한 의미를 가짐.
식민지에서 해방된 지역에 대한 새로운 인식은 국제학, 지역학, 정치학 등에서 먼저 나타남.
저개발 국가의 역사, 문화, 사회구조의 다양성과 서구 사회와 이들 사회 간의 차이점이 명확하게 인식되어야 한다는 지적
1950년대를 통해 아시아 문제와 관련하여 로스토우뿐만 아니라 라이샤워(E.O. Reischauer), 갈브레이스(J.K. Galbraith)와 동북아시아 문제 전문가였던 스칼라피노(R.A. Scalapino) 등이 모두 이러한 경향을 대표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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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칼라피노 교수는 1945년 이전 중국, 일본, 한국의 공산주의 운동에 대한 연구를 통해 동북아시아의 정치적 특수성을 밝히기 위한 연구성과를 냈으며, 상원외교위원회의 요청으로 콜론(Conlon Associates) 보고서를 제출함.
라이샤워 교수는 서구의 시각에 기초하여 동아시아 사회를 분석하면 안 된다는 점을 강조함.
미국식 보편주의에서 벗어나 미국식 민주주의를 아시아와 아프리카에 그대로 대입하는 경향에 대한 비판도 제기됨.
이러한 주장은 서유럽 중심의 보편주의보다 진보적인 견해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서구 기준으로 볼 때 비-민주적인 저개발국의 군부 정권에 대한 지원이 가능하도록 만드는 이론적 배경을 제공함.
135-
이러한 저개발국 경제개발론의 중심에 로스토우가 있었음.
그는 28살이던 1940년에 박사학위를 받음.
졸업 직후 미 전략사무국(OSS)과 국무부의 유럽경제위원단(the Economic Commission for Europe)에서 일하면서 관료로서의 경험을 쌓았음.
136-
1950년부터 로스토우는 MIT의 국제학연구소에서 교수로 머무르면서 아시아 지역을 중심으로 하여 제3세계에 대한 새로운 정보와 전략의 필요성을 제기함.
138-
이 시점에 이미 매사추세츠 주 상원위원이었던 케네디를 자문
1960년에 케네디의 대통령 선거운동 캠프에 참여
이후 미국의 1960년대 대외정책의 중심에서 입안 과정에 직적 참여
제3세계 정책 이론에 근거하여 인도에 대한 원조를 결정하는 케네디 쿠퍼 결정안 통과에 기여
케네디 행정부에서 ‘대외경제정책을 위한 긴급입무팀’(The Task Force on Foreign Economic Policy)에 참여하여 주로 아시아 지역을 담당
1961년부터는 케네디 대통령과의 갈등으로 정책 결정 과정에서 밀려났으나
139-
존슨 행정부에서 로스토우를 ‘진보를 위한 동맹’(CIAP)의 대표로 임명
로스토우는 존슨 대통령의 베트남 정책의 강력한 지지자 중 한 명
강력한 반공주의자이기도 했던 그는 베트남이 무너진다면 동남아시아와 호주 지역까지도 위기에 빠질 거라며 북베트남에 대한 전면적인 폭격을 강력하게 지지함.
존슨 대통령이 결국 부분적으로 베트남에 대한 폭격 중지를 결정하고 이후 대통령 선거에 불참하면서 로스토우도 미국 정치의 중앙 무대에서 밀려남.
2) 로스토우의 근대화론
141-
로스토우의 새로운 대외 정책 논의는 아이젠하워 행정부에 대한 비판에서 출발함.
첫째 1950년대 미국의 후진국 원조가 너무 군사적인 측면만을 강조
한국 타이완 인도차이나 등에서 농업과 경공업 부문의 희생을 가져왔으며 궁극적으로는 이들의 경제 성장을 막을 것이라고 지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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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공산주의의 확장을 위해 가장 중요한 부분은 아시아에 있다”면서 미국이 그동안 아시아에 너무 무관심한 채 유럽만을 우선시 하였다고 비판
144-
셋째, 미국은 저개발 국가의 경제발전에 더 많이 신경 써야 한다는 것
미국이 지금까지 저개발국가의 경제 수준에는 어울리지 않는 군사적 투자에 너무 큰 투자를 해왔다고 비판
이들의 경제 발전에 더 신경을 써야 한다고 주장함.
146-
그의 계획대로라면 미국이 상당히 많은 액수의 자금을 원조자금으로 지출해야 했지만, 이것이 미국이나 서구의 경제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며 원조자금의 증액을 합리화함.
147-
로스토우는 저개발국의 식민지로서의 경험에 주목하며 이러한 경험이 한편으로는 경제구조의 불균형성을 조성하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식민지 시기 동안 사상 지식 제도를 변용하고 사회적 간접자본을 공급받음으로써 근대화의 혜택을 입었다고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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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스토우는 식민지 경험으로 말미암아 형성된 강력한 민족주의가 저개발국가에서 경제개발계획을 실행할 수 있는 국민적 통합성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주장함.
149-
1950년대에 미국의 다른 정책결정자들이 제3세계의 선진국화 가능성을 낮게 점치고 그들의 민족주의가 미국에 적대화될 것을 걱정한 것과 달리, 로스토우는 민족주의를 제3세계를 적극 적으로 세계자본주의 체제 내로 흡수할 수 있는 동력으로 봄.
151-
로스토우는 지금까지 미국의 원조가 그랬듯이 그저 주기만 해서는 안 되며, 원조를 받는 각 수혜국이 원조를 효율적으로 이용할 수 있도록 저개발 지역 자체에서 토지개혁, 세재개혁, 정부조직 개혁과 같은 물질적인 수준에서는 물론 부패구조의 개혁과 같은 정신적인 개혁도 이뤄져야 한다고 봄.
152
로스토우는 후진국 내의 지배 세력이 지식인-상인-군인의 연합이 되어야 한다고 봄.
이 중에서도 특히 군인이 차지하는 중요성을 강조함.
152-
로스토우의 동료였던 밀리칸(M.F. Milliikan)도 군사원조의 방편으로서 제3세계의 장교들을 미국에서 교육해야 한다고 주장함.
군부 정권에 대해서 미국식 민주주의 사고방식을 강요할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지원해야 한다고 권고함.
154-
그러나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이러한 로스토우의 정책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많은 자금이 투입되어야 하고 이는 미국의 납세자들을 설득해야 가능한 것
로스토우는 자신이 주장하는 경제개발원조의 궁극적인 목적이 미국을 포함한 선진국들의 번영에 있으며, 저개발국의 경제발전은 선진국의 번영을 위해 필수적이라는 점을 계속 강조
155
미국의 잉여 농산물을 중요한 원조의 수단으로 강조한 것도 원조가 미국의 경제 상황을 고려한 것
그는 잉여 농산물 원조가 저개발국의 농업 생산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이를 위해 섬유나 식량의 경우 국제 기구를 마련해 이를 잘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정 도로 이러한 문제제기를 무마했음.
157-
의회의 비판을 막기 위해 그가 고안한 또 하나의 수단은 저개발국 원조에서 서구 유럽과 일본이 더 큰 역할을 하도록 새로운 기구를 조직하는 것
1950년대까지는 일본이 충분히 부흥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의 전략이 제대로 작동하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임.
3. 1960년대 초 미국의 저 개발국 정책 변화
1) 로스토우 이론의 확산
160
1950년대 후반 미국 내의 후진국 정책에 대한 비판은 학계나 정치계에서 어느 정도 공감대를 형성
160-
뉴룩 정책 하에서 ‘거대한 균형’(Great Equation)을 추구하던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정책을 대대적으로 수정하는 것은 쉽지 않다고 봄.
162
미국의 저개발국 정책에서의 변화는 의회에서 제일 처음 시작됨.
케네디가 MIT와 하버드 대학의 교수들을 중심으로 ‘케네디 마피아’를 형성하면서 본격적인 궤도에 오름.
162-
케네디는 대통령 취임 후에 이들을 중용하여 대외정책 변화를 이끌었음.
이들 중에는 1952년 한국의 경제개발계획과 관련된 네이산 보고서를 작성한 네이산(R. Nathan)도 포함됨.
2) 로스토우에 근거한 새로운 대외정책
164
로스토우는 아이젠하워 행정부의 뉴룩 정책을 ‘올드룩’(old look: 오래된 패션)으로 비판하면서 새로운 사고에 기반한 ‘뉴룩’(new look)의 창출을 주장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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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성장의 5단계에 맞추어 각 단계에 따라 적절한 방식의 경제개발 원조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
도약을 위한 선행조건 충족의 단계
도약단계
전환하기 위한 기초가 나타나기 시작한 곳
짧은 기간 내에 자본을 생산적을오 흡수할 수 있는 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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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개발 원조로 전환하는 문제뿐만 아니라 저개발국의 새로운 지도력으로서 군인들에 대한 집중적인 지원을 거론하기 시작함.
케네디 행정부에서 곧바로 미국의 대외 원조에 반영됨.
3) 대일정책의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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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스토우의 주장으로 인해 아시아가 맞이한 가장 큰 변화는 미국의 대아시아 정책이 일본을 중심으로 재편되는 것
1950년대 당시 일본 경제가 아시아를 감당할만큼 충분히 성장하지 못했으며 일본에 대하여 다른 아시아 국가들이 갖고 있던 반감을 충분히 고려하지 못했다는 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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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 이후 일본은 적극적으로 대외적 영향력을 확대하기 시작
일본의 경제적 역할 확대가 미국의 대아시아 정책 핵심이라고 본 로스토우의 시각과 맞닿아 있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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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당시 일본 내부의 경제 상황이 아시아에 대한 대외 원조를 실행하기에는 적절하지 못한 상황이었음에도 일본의 경제원조와 관련된 정책이 변화한 것은 미국의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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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1950년대와 달리 1963년 아시아개발은행과 관련된 논의가 처음 제기되었을 때 적극적으로 나섦.
1965년에 미국이 아시아개발은행에 대해 적극적인 참여를 알린 이후 아시아개발은행 본부 유치와 일본인 총재 선출에 나서는 등 적극적인 태도를 보임.
(2024.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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