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요새 어느 업체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 이번에 처음 간 건 아니고 몇 년 전에 가본 적이 있는 업체다.
몇 년 전 나와 철학과 대학원을 같이 다녔던 사람이 그 업체에 취업하고 나서 나를 부른 적이 있었다. 나는 아르바이트 할 게 생겼나 보다 하고 별다른 생각 없이 업체에 갔다. 사무실에 가니 어떤 아저씨가 나한테 이것저것 물어보았다. 나는 생각나는 대로 답했더니 그 아저씨가 나보고 “시장에 대한 감각이 좋으신 것 같네요”라고 했다. 기분이 좋았다. 기업에서 처음 만난 사람한테 이런 이야기를 듣다니, 역시 나는 감각이 있나 보다 싶었다. 며칠 후에 업체에서 연락이 왔다. 면접에 합격했으니 언제 나오라는 것이었다. 나는 그게 면접인 줄 몰랐다. 뒤늦게 알게 된 사실인데 나한테 이것저것 물어보았던 아저씨는 그 업체의 이사였다. 이사님이 나보고 시장에 대한 감각이 좋다고 하다니 기분이 좋았다.
내가 업체에서 할 일은 교재 개발이었다. 처음에는 업체에서 시키는 것을 웬만큼 하면 대충 뭐가 될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업체에서 요구하는 것을 다 들어보니 실행불가능한 것이었다. 마치, 둥근데 삼각형인 것을 만들어 달라는 식이었다. 납품해야 돈을 받을 텐데 회사에서 납품할 수 없는 만들어달라고 하는 판이라 돈을 못 받을 것이었다.
그만 두어야 하나 고민을 하던 중 마침 어떤 프랑스 철학 박사가 정말 이상하고 말도 안 되는 것을 너무 정성껏 발표하는 것을 보고 말았다. 그 때 결심이 섰다. 나는 이사님께 이메일을 보냈다. 회사에서 나에게 시키는 일은 실행가능하지 않으며 그러한 방식의 교재 개발이 왜 가능하지 않은지 그 이유를 대략 다섯 가지 정도로 정리하여 이메일로 보낸 것 것이다. 그러자 업체에서 연락이 왔고, 이사님하고 저녁식사를 같이 하게 되었다. 이사님은 내가 보낸 이메일을 받고 회장님께 포워딩했고 회장님이 나를 데려오라고 했다고 한다. 회장님한테 말하고 싶은데 말하지 못 하던 것을 내가 글로 정리해서 이사님은 그걸 회장님한테 보냈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사님은 나에게 같이 일을 해보자고 했다. 좋은 기회일 수도 있었으나 아무래도 가망이 없는 것을 시키는 것 같아서 정중히 거절했다. 실제로, 이후 교재 개발은 무산되었다.
그로부터 몇 년이 흘러 얼마 전, 같이 대학원을 다닌 다른 대학원생에게서 연락을 받았다. 그 대학원생은 업체에서 하고자 하는 일을 대략 설명하고 언제 업체에 올 수 있냐고 물었다. 이번에는 그게 면접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이번에도 딱히 준비할 것은 없어서 그냥 갔다. 몇 년 전 면접 때 보았던 이사님이 있었다. 지금은 본부장님이라고 했다. 그 사이에 본부장이 되었던 것이었다. 그 옆에는 어떤 여성분이 있었는데 팀장이었다. 두 사람이 처음에는 내가 어디서 무슨 아르바이트를 어떻게 했는지 약간 묻더니 회사에서 하려는 프로젝트에 대해 한참 물었다. 나는 이건 되고 저건 안 된다, 이건 이러이러해서 되고, 저건 저러저러해서 안 되고, 요건 요렇게 고치면 될 수도 있다는 식의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했다. 내가 회사에 대해 뭘 안다고 그러겠느냐만 어차피 나는 책임질 것도 없으니까 생각나는 대로 말했다. 이번에도 본부장님은 “시장에 대한 감각이 좋으신 것 같네요”라고 했고(그런데 내가 전에 온 사실은 기억하지 못했다), 그렇게 한 시간 넘게 면접을 보았다. 며칠 뒤에 업체에서 연락을 받았고 아르바이트하기로 했다. 대충 보니까 이번 것은 어쨌든 납품을 하기는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직 프로젝트 기획이 다 끝난 것도 아니어서 어떤 식으로 진행될지는 정확히 모른다. 일단 정해진 것은 업체, 교수진, 학생그룹으로 구성되어 있고, 교수진의 연구를 바탕으로 업체에서 어떤 것을 만들 때 학생그룹이 둘 사이에서 무언가를 한다는 것이다. 이 세 집단은 이해관계가 다 다르고 방향성도 다르고 관점도 다르다. 가만 보면, 업체 내에서도 의사결정권자와 실무진의 의견이 다르다. 이게 묘하다. 뚜렷한 악당이 있는 것도 아닌데 뭔가가 약간씩 어긋나는 게 보인다. 각각 따로 놓고 보면 대략 맞는 말 같은데 모아놓으면 맞아떨어지지 않는다.
어느 날은 업체 직원이 나에게 기획 방향에 대해 간략한 표 같은 것을 보여주면서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내가 몇 가지를 지적하자 직원은 내 말이 맞다고 했다. 직원도 나와 비슷하게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도 최대한 기존 기획 방향을 따르는 방식으로 업무를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 주어진 제약조건 내에서 주어진 과제를 결합하니 보고할 수 있는 말이 그 정도밖에 없었던 것이다.
지난 번 것과 달리, 이번 것은 잘 될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나는 내가 맡은 만큼 납품할 수만 있으면 된다. 이게 내 업체도 아니고 내가 정직원인 것도 아니고 한낱 프리랜서로 계약한 것이라 업체에서 시키는 만큼만 잘 하면 된다. 물론, 업체에서 뭔가 잘못 생각하고 있으면 적극적으로 의견을 개진하기는 한다. 업체에서 방향을 잘못 잡으면 내 노동 강도와 노동 시간이 늘어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미 부여된 결정적인 제약 조건은 내가 손 댈 수 없는 거라서 그 부분에 대해서는 굳이 말하지는 않는다. 그 부분에 손을 댄다면 아마 같은 결과를 내기 위해 들어갈 예산을 상당히 줄어들 것 같지만 어쩔 수 없다.
업체에서 관찰하면서 든 생각은, 업체에서 교수단을 꾸리고 교수들에게 업체에서 바라는 바를 설명하고 부탁하는 방식으로 일을 진행하기보다는, 교수가 먼저 회사에서 혹할 만한 것을 마련해 오는 것이 업체와 교수 모두에게 이롭겠다는 것이다. 업체는 사업을 하고 싶어 하고 교수는 연구를 하고 싶어 하니까 간극이 생기는 것인데, 교수가 처음부터 사업을 염두에 두고 연구단을 짜고 외부 인력을 섭외하는 식으로 일을 설계한다면, 회사의 요구에 부응하면서도 효과적으로 주변 사람도 챙기고, 새로운 사람도 만나고, 더 적게 일하고 돈도 벌 수 있지 않을까? 그러려면 내가 교수가 되어야 하는데, 사실 졸업 자체도 결코 쉽지 않다.
학업에 딱히 재능이 없는 내가 학업을 포기하지 않게 한 가장 큰 원동력은 아르바이트였다. 아르바이트하면서 본 전망 때문에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이다. 그런데 나는 교수를 할 수 있을까? 교수가 되어야 업체랑 일할 때 내 구상대로 하고 내가 하자는 대로 인력 배치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보통은 남이 잘 되면 웬만큼 친한 사이여도 시샘하기 마련인데, 내가 교수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하는 사람들 중 일부는 정말로 진심으로 내가 교수가 되기를 바라는 것 같다. 어떻게든 교수가 되어야 할 텐데.
(2023.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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