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도 배나무에 꽃이 피었다. 죽지 않고 살아서 올해도 꽃을 피웠다.
담장 안에 있던 배나무를 옮겨심은 것은 작년 2월이다. 건설업체가 우리집에 민사소송 관련하여 가처분신청을 걸었을 때 내가 사유지 경계에 옮겨 심은 나무가 50그루 정도 된다. 그 중 옮겨심기 가장 힘들었던 나무가 배나무였다.
원래는 배나무를 베어서 없앨 생각이었다. 아버지는 나무를 제대로 기르지도 못하면서 아무 데나 무분별하게 심었는데, 그 중에서도 배나무는 정말 말도 안 되는 위치에 심어서 내가 베어 없애려고 했다.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위치였느냐면, 감나무와 탱자나무가 너무 가까이 있었는데 아버지가 그 사이에 배나무를 심어서 감나무와 배나무와 탱자나무가 가지를 비비며 서로 싸우게 만들었던 것이다. 세 나무가 엉켜 있는 꼴이 너무 말도 안 되어서 기회를 보아서 배나무를 없애려는 것을 어머니가 말려서 베지 않았다. 그러다 마침 건설업체와 분쟁이 생겨서 배나무를 사유지 경계에 옮겨심게 되었다.
처음에 배나무를 옮겨 심을 때는 별다른 생각이 없었다. 토지 경계를 표시하기 위해 옮겨 심은 나무는 주로 내 키와 비슷한 높이의 나무였는데, 농로 입구 쪽에는 가능한 한 큰 나무를 옮겨 심고 싶었다. 실제로는 크지 않지만 커 보이는 나무를 농로 입구에 심어서 건설업자들에게 위압감을 주고 싶었다. 마침 집 안에 없애려던 배나무가 눈에 들어왔다. 배나무는 감나무와 탱자나무와 싸우는 와중에 위로만 웃자랐다. 배나무의 높이가 꽤 되기는 했으나 웃자란 것이라 뿌리가 그리 깊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배나무 근처를 삽으로 파기 시작했다.
배나무 근처를 삽으로 파면서 내가 약간 잘못 생각했음을 알게 되었다. 배나무가 웃자란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해서 뿌리까지 짧은 것은 아니었다. 나무는 심근성 나무와 천근성 나무로 나뉘는데, 배나무는 천근성 나무라서 사방으로 뿌리를 넓게 뻗는 성질이 있었다. 뿌리를 따라 계속 땅을 파다가는 옮겨 심을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적당한 지점에서 톱으로 뿌리를 잘랐다. 뿌리를 너무 많아 잘라서 ‘이렇게 잘라도 나무가 살 수 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는데도 뿌리에 붙은 흙덩어리가 너무 컸다. 그렇다고 흙을 털어내면 나무의 생존을 보장할 수도 없었다. 배나무 뿌리에 흙이 붙은 상태 그대로 배나무를 외발수레에 싣기로 했다.
배나무 뿌리와 흙덩이가 너무 무너워서 구덩이에서 들어올릴 수가 없었다. 구덩이 옆에 구덩이를 하나 더 파서 거기에 외발수레를 밀어넣고, 배나무 뿌리를 굴려서 옆으로 눕힌 외발수레에 실은 다음, 구덩이 안에 빗면을 만들어서 구덩이 밖으로 외발수레를 꺼냈다. 그렇게 중장비의 도움 없이 오직 사람의 힘으로만 배나무를 옮겨 심었다. 중장비를 사용하려면, 담장을 부수고 들어왔어야 했을 것이다. 그렇게 불과 설날 연휴 동안 농로 입구 근처 사유지에 배나무가 생겼다.
나무 하나 옮기려고 그 난리를 쳤으니 배나무가 살 가능성이 높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일단 건설업자들에게 겁을 주고 시간을 번 다음에 조치를 취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당시는 2월이라 배나무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려면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고, 배나무가 죽는다고 해도 경계를 표시하는 데는 충분했기 때문에 중장비를 끌고 함부로 사유지 안으로 들어올 수 없을 것이었다. 그렇게 배나무가 죽어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던 중, 배나무에 싹이 트고 꽃까지 피기 시작했다.
배나무가 살아나고 꽃까지 피우자 배나무에 대한 마음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애초에 없애버리려고 했던 나무였고 옮겨심었을 때 살 것이라 기대하지도 않았던 나무였는데 옮겨 심은 그 해 봄에 멀쩡히 살아서 꽃까지 피우니 생각이 달라졌다. 배나무라고는 하지만 먹을 만한 배 하나 열리지 않는 나무인데도 자꾸 신경을 쓰게 되었다. 막걸리를 마시고 나서 병에 찌꺼기가 남으면 이를 모은 다음 물에 희석하여 배나무에 뿌렸다. 찌꺼기만으로도 막걸리 여러 병은 배나무에 주었을 것이다. 그리고 올해에도 멀쩡히 살아서 봄에 꽃을 피운 것이다.
(2022.0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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