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한 사람들이 강연하러 학교에 가끔씩 온다. 성공한 사람들이 자신의 성공 요인이나 비법을 곧이곧대로 이야기할 리는 없지만, 그래도 다른 분야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흥미로운 구석이 하나씩은 있기 마련이어서 가끔씩 그런 강연을 듣는다. 원래 오늘은 논문을 읽고 발제를 준비해야 했는데 강연 포스터에 있는 문구가 내 마음을 움직였다. 강연 제목이 <인문학적 성찰이 답이다>였다. 강연에 아무 내용이 없다는 것이 이미 제목에 드러났지만, 사교육 분야에서 어마어마하게 성공한 사람이 인문학을 가지고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궁금해서 강연을 들었다. 예상대로 쓸 만한 내용은 하나도 없었다.
강연자는 해당 분야에서 1-2위를 하는, 매우 크게 성공한 사람이라 사업 성공만 자랑해도 충분히 들을 가치가 있는 강연이 될 것이었는데 그 사람은 뜬금없이 인문학적 통찰을 꺼냈다. 고등학교 2학년 때의 “개똥철학”부터 이야기했다. 정말 개똥같은 소리였다. 고등학교 2학년 겨울방학 때 어떤 여학생을 좋아했는데 “나는 너는 좋아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와 “나는 공부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존재의 갈등”을 화해하려고 했다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로 강연을 시작했다. 환갑이 넘은 사람이 왜 그렇게 첫사랑에 집착하는지 모르겠다. 정해진 시간을 넘겨 가며 강연한 것 중 절반 이상은 첫사랑 이야기였다.
첫사랑 이야기를 하느라 정작 사업 이야기는 조금밖에 안 했다. 강연자는 사업 구상하느라 고민한 것도 인문학적 통찰이라고 했다. 어느 지점에 인문학이 있는지 도통 알 수 없었다. 명문대학의 인문대를 나오고 굉장한 성공을 해서 그런지 강연자는 생각하는 바를 거침없이 말했다. 강연자 본인은 자신의 성공 원인이 인문학이라고 굳게 믿는 것 같았다. 인문학 소양이 전혀 없어 보이는데도 강연자는 거침없이 인문학 타령을 했다. 심지어, 강연장 뒤쪽에는 인문대 각 과의 교수들이 한 명씩 앉아있었는데도 강연자는 눈치 보지 않았다. 방송에 등장하는 떠벌이들도 저 정도로 자신 있게 이야기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역시 사람은 성공하고 볼 일이다.
강연이 끝나고 질의응답 시간이 되었다. 한 질문자는 강연자가 말한 인문학적 통찰이 무슨 뜻이냐고 물었다. 강연 내내 인문학적 통찰이 필요하다고 강조했지만 정작 인문학적 통찰이 무엇인지도 말하지 않았다. 강연자는 이렇게 말했다. “인문학적 통찰은 수업을 통해서 듣는 것이라기보다는 많은 독서를 통해 얻는 것입니다. 인문학은 공부의 대상이 아니고 삶으로 사는 것입니다. 이건 내 말이 아니고 내 선배 ◯◯◯ 박사가 한 말이에요.”
사람들은 말하는 인문학이란 대부분 감정을 배설하거나 해소하는 도구에 불과한 경우가 많다. 강연자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오히려 거침없는 그 모습이 마치 일반인을 돋보기로 확대해놓은 것 같아서 관찰하기 좋았다.
인문학은 공부의 대상이 아니고 삶으로 사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들이 궁금해 하는 주제는 삶, 죽음, 사랑, 이렇게 딱 세 가지뿐이다. 수, 명제, 인과, 모형, 법칙 같은 것은 조금도 궁금해 하지 않는다. 삶, 죽음, 사랑이라고 해도 그것에 대한 진지한 물음이나 탐구에는 관심이 없다. 아무리 귀를 기울여도 별 내용은 찾을 수 없고 삶과 죽음과 사랑에 대한 불안한 감정과 그러한 감정을 해소하고자 하는 욕구만이 있을 뿐이다. 인문학의 필요성은 실존적인 불안이며, 진짜 인문학과 가짜 인문학의 구분 기준은 그 불안을 얼마나 잘 해소할 수 있는지 여부이다. 인문학을 삶으로 사는 것이라는 말은 그러한 체험에서 느끼는 정서나 감정을 말하는 것 같다.
말이 고상해서 삶과 죽음과 사랑이지, 바꾸어서 말하면 생존과 번식이다. 딱 우리집 화천이가 그 정도 수준일 것이다. 개나 고양이들도 생존과 번식에 대한 불안과 불만을 느낀다. 화천이를 동물 병원으로 데려갈 때의 그 불안한 눈빛이라든가, 짝짓기가 잘 안 될 때 눈노란놈의 서글픈 눈빛을 보면 동물들에게도 그러한 감정이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인문학은 공부의 대상이 아니고 삶으로 사는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말하는 인문학이라는 것은, 화천이의 지적 활동보다 그렇게 고차원적인 것 같지는 않다.
(2018.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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