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10/06

진정한 페미니즘과 잠재적 가해자

   
계량화하기 힘든 것에 ‘진짜’나 ‘진정한’을 붙이기 시작한다면, 그 논의는 수렁으로 빠진다고 보면 된다. ‘진짜’나 ‘진정한’은 난장판이 임박했음을 보여주는 지표이라고 할 수도 있다.
  
금이나 꿀 같은 것은 진짜와 가짜를 가릴 명확한 기준이 있다. 철학이나 인문학은 그렇지 않다. 이것은 미남이나 미녀의 기준을 제시하는 것과 비슷하다. 사람들은 누가 미남이고 미녀인지 분별할 수 있고 대부분 비슷한 사람을 미남이나 미녀로 지목하지만, 미남이나 미녀의 명시적인 기준을 제시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철학이나 인문학도 마찬가지다. 그런데도 철학이나 인문학에 ‘진짜’나 ‘진정한’을 붙이는 사람은 어떤 사람들인가. 대부분은 쥐뿔도 모르면서 자기도 남들만큼 안다고 남들에게 인정받고 싶어 죽겠는 사람들이다.
  
학계에서 논의되는 철학이 있다. 철학을 모르면 “나는 철학을 모른다”라고 하면 그만이다. 그런데 철학을 안다고 말하고 싶고 어찌된 것인지 뭔가 아는 것 같다는 착각이나 자기기만 같은 데 빠지는 정신이 약한 사람들이 있다. 그럴 때 그들이 쓰는 전략이 ‘진짜’ 철학, ‘진정한’ 철학이다. 철학자들이 진짜 철학과 가짜 철학을 구분하는 명확한 기준을 제시하지 못하는 것을 악용하여 자기 머리 속에 들어있는 개똥 같은 철학과 정상적인 철학을 구분하는 기준도 없고 따라서 자기도 철학을 알거나 할 줄 안다고 주장한다. 물론 개똥 같은 소리다.
  
‘진짜 보수’, ‘진짜 좌파’, ‘진짜 페미니스트’라는 단어를 쓰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이런 사람 치고 해당 주제나 분야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은 드물다. 해당 분야 전공자들은 웬만하면 그런 식으로 이야기하지 않는다. 로즈마리 퍼트넘 통 같은 사람들이 쓴 책만 봐도 페미니즘을 아홉 가지로 분류한다. 정상적인 페미니즘 연구자가 ‘진짜’나 ‘진정한’ 같은 말을 쓰겠는가?
    
<메갈리아>가 사회 쟁점이 되면서 주변에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듣는다. 자신을 페미니스트라고 자처하거나 자기가 아는 사람 중에 페미니스트가 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일단 그 사람이 페미니스트이기나 한지 의심해볼 필요가 있다. 보통, 어떤 활동을 하는 사람은 활동 내용이나 범위를 말하지 무슨 주의자라고 소개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어떤 노조에서 활동하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제가 이주 노조에서 활동하는데요”라고 말하지 “제가 사회주의자인데요”라고 말하지 않는다. 어떤 사람을 설명할 때 활동 내용이 아닌 무슨 주의자로 설명한다는 것은 사실 그 사람이 쥐뿔이나 아는 것도 없고 하는 것도 없다는 것이다. 한두 마디만 들어도 대충 그 사람이 어느 정도의 무식쟁이인지 견적이 나오는 것은 그 때문이다.
  
나는 최근에 페미니즘에서 “잠재적 가해자”라는 개념이 매우 핫하다는 이야기를 주변에서 들었다. 내가 스무 살 때부터 10년 넘게 들은 헛소리인데 최근에 페미니즘에서 핫하다는 것이다. 무슨 이야기인가 일단은 들어보기로 했다. 남자는 여자한테 잠재적 가해자일 수 있고 여자도 애완동물한테는 잠재적 가해자일 수 있다는 식의 이야기였다. 잠재적 가해자 같은 개념으로 무엇을 설명할 수 있는가? 아무 것도 없다. 남자가 여자에게 잠재적 가해자일 수 있다고 하자. 그래서 어쩌라고? 여자가 애완동물에게 잠재적 가해자일 수 있다고 하자. 그래서 어쩌라고? 힘 있는 사람이 힘 없는 사람에게 폭력을 가하면 안 된다고 없어 보이니까 전문 용어처럼 보일 것 같은 용어를 끌어온다. 그래봐야 개소리는 개소리다.
  
잠재적 가해자 같은 뭔 개뼈 같은 소리를 들으면, 잊고 있던 학부 때의 악몽이 스믈스믈 떠오른다. 반-성폭력 내규 교양을 하면 꼭 빠지지 않고 “왜 남자를 잠재적 가해자로 보냐”는 신입생 놈들이 있었다. 반-성폭력 내규 교양하는 게 잠재적 가해자로 보는 것이면, 병원에 가서 건강검진 받으라고 하는 건 그 사람을 잠재적 시체로 보는 것인가? 정신 나간 소리를 하는 놈들이 어쩌다 한두 명 있는 것도 아니어서 이 것들은 단체로 헛소리 학원이라도 다니나 싶었는데, 그게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실제 쓰는 말이었다. 그런데 그게 시간이 지나면서 순화된 게 아니고 더 정신 나간 소리로 업그레이드 된 것이다.
   
나는 어떤 여성학자가 그런 정신 나간 소리를 하나 싶어서 관련 논문을 RISS로 찾아봤는데 잠재적 가해자 같은 용어를 쓴 논문은 단 한 편도 나오지 않았다. 구글에서 한글로 찾아보고 영어로 찾아보았지만 범죄학에서나 나오지 여성학자 중 그런 용어를 사용하는 사람을 찾지 못했다. 아마도 범죄학에 등장하는 잠재적 가해자는 가상 적국과 비슷한 의미로 쓰이는 것 같다. 잠재적 가해자 같은 소리를 하는 사람은 관련 서적을 읽고 그러는 것도 아니고 관련 논문을 읽고 그러는 것도 아니다. 딱 자기만큼 알고 자기만큼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 아무렇게나 쓴 글을 보고 확신을 얻어 무식한 소리를 하는 것뿐이다.
  
상황이 이런 데도, 페미니스트를 자처하는 사람들은 곧 죽어도 자기가 페미니스트라고 우긴다. 그 때 사용하는 필살기가 ‘진정한’ 페미니스트이다. 당신은 어떤 근거로 페미니스트냐는 나의 물음에, 어떤 사람은 “여성 차별에 반대하면 누구나 페미니스트다”라고 답했다. 좋은 이야기이기는 한데 그런 말을 특정 상황에서 정치적 구호로 쓰는 게 아니라 정말 본인이 그런 사람이라고 믿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쥐뿔 아는 것도 없고 판단 능력도 좋지 않은 사람들이 과도한 확신을 가지면 반드시 헛짓거리를 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들이 헛소리하고 헛짓거리하면, 그들과 무관하게 여성단체에서 최저 임금 받아가며 헌신적으로 활동하는 정상적인 활동가들이 욕을 먹는다.
    
   
(2016.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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