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6/21

토마스 쿤은 그리스어로 사색했는가?



이지성은 인문고전을 원전으로 읽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원전을 읽는 것은 좋은 일이다. 하지만 그 근거가 너무 황당하다. 『생각하는 인문학』에서 이지성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인문고전을 왜 원전으로 읽어야 하는 것일까. 이유는 간단하다. 원어로 사색하기 위해서다. 원어로 사색하는 시간을 갖지 않는 원전 독서는 무의미하다. [...] 예를 들면 그리스 고전을 읽고 사색할 때 ‘형상’ 대신 ‘이데아’, ‘탁월함’ 대신 ‘아레테’, ‘억견’ 대신 ‘독사’, ‘이성’ 대신 ‘누스’로 생각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사색의 깊이와 밀도가 달라진다. 당신이 이 경험을 꼭 해봤으면 좋겠다.(318쪽)


도대체 이지성은 어떤 경험을 했길래 사색의 깊이와 밀도가 달라졌다는 것인가? ‘형상’ 대신 ‘이데아’라고 단어만 바꾸어 쓰는 정도로 사색의 깊이와 밀도가 달라질 정도라면, 고대 그리스어로 된 문장을 자유롭게 읽는 수준을 넘어서 아예 플라톤 대화편을 고대 그리스어로 읽는 고대철학 전공자들에게는 신비롭고 기적적인 일이 벌어져야 할 것이다. 그런데 정작 고대철학 전공자들 중에 그러한 신비로운 현상을 체험했다고 증언하는 사람은 없다.


『과학 혁명의 구조』라는 책으로 20세기 과학철학의 역사를 새롭게 쓴 토머스 쿤의 사례를 보면 인문고전 저자의 관점에서 원어로 사색하는 일은, 세계 최고의 인문학 교육을 받은 아이비리그 출신들의 두뇌도 새롭게 변화시키는 것 같다. 토머스 쿤은 하버드 대학교 물리학과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유럽에서 군사 관련 기술 연구를 하다가 다시 하버드로 돌아와 학생들을 가르쳤는데, 이때 보다 더 훌륭한 강의를 위해 인문고전을 원전으로 읽는 것을 넘어서 인문고전 저자의 관점에서 원어로 사색하기를 실천하다가 황홀한 깨달음을 얻었고, 후일 전 세계의 과학철학계가 혁명으로 평가하게 될 이론을 정리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320쪽)


토마스 쿤이 “인문고전 저자의 관점에서 원어로 사색하기를 실천하다가 황홀한 깨달음을 얻었”다니! 이지성이 고대 그리스어 단어 몇 개를 읊조리고 나서 사색의 깊이와 밀도가 달라지든 말든 그건 이지성 개인의 경험이니까 그렇다고 치고, 토마스 쿤은 어디에서 그런 체험을 했다고 증언하는가? 당연히 이지성의 책에는 그런 출처나 원문 같은 것은 나오지 않는다.

토마스 쿤이 고대 그리스어로 된 책을 읽었는지 여부를 확인하는 것은 간단하다. 쿤의 저작에 나오는 참고문헌을 확인하면 된다. 『과학 혁명의 구조』는 3판이든 4판이든 주석만 있지 별도로 참고문헌란이 없다. 이지성의 말이 개소리임을 입증하기 위해 굳이 『과학 혁명의 구조』의 주석을 모두 살펴볼 필요는 없다. 『코페르니쿠스 혁명』(The Copernican Revolution)의 참고문헌란에는 고대 그리스어 원전은 없고 『The Works of Aristotle Translated into English』 같은 번역서만 있다. 토마스 쿤은 영어로 번역된 원전을 읽고 영어로 사고했던 것이다.

* 참고 문헌

이지성, 『생각하는 인문학』, 차이, 2015.

(2016.0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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