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0/16

드라마 <징비록>은 왜 <정도전>만큼 인기를 끌지 못했나

드라마 <징비록>은 정치드라마다. <징비록>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임진왜란이지만, 전투 자체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전쟁이 정치의 연장선에 있음을 보이려고 했다. 임진왜란을 다룬 이전의 드라마가 전쟁의 참상이나 전투 장면이나 몇몇 사람의 영웅적인 면모 같은, 지극히 단편적인 측면을 부각하는 데 급급했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징비록>은 한국 드라마의 완성도가 높아졌음을 보여주는 사례일 것이다.

약간 심하게 말하자면, <불멸의 이순신>은 무협지에 가깝다. 없는 사실을 지어낸다는 게 아니라, 세상이 한 사람을 중심으로 돌아간다는 점에서 그렇다. 악귀처럼 몰려드는 일본군, 뺀질거리며 민폐나 끼치는 명군, 아군한테 총질 하는 조선 조정, 의심 많고 견제나 하는 선조, 그 한가운데에서 외로운 영웅 이순신이 자신 앞에 놓인 짐을 짊어지고 간다는 게 <불멸의 이순신>의 기본 구도다. 여기서 일본이든 명이든 그들 나름대로의 사정은 드라마의 고려대상이 아니며 영웅의 앞길을 가로막는 장애물에 불과하다.

이와 달리 <징비록>은 세 나라의 이해관계뿐만 아니라 각 나라 내부의 권력관계까지 보여주려고 했다. 내가 알기로 임진왜란을 다룬 드라마 중에서 세 나라 내부 사정을 이만큼 자세하게 다룬 드라마는 없는 것 같다. 이 점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그런데 <정도전>을 넘어서겠다던 <징비록>은 <정도전>만큼 재미가 없다. 별다른 화제가 된 것 같지도 않다. 왜 그런가? 드라마든 영화든, 극적인 긴장감과 그 해소가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징비록>에는 그런 것이 없다. <정도전>과 달리 <징비록>에는 별다른 시원한 맛이 없다.

<정도전>은 주인공이 위기를 겪고 그것을 이겨나가면서 점점 성장해 결국은 고려왕조를 무너뜨리고 조선왕조를 개창한다. 그리고 잠깐 한눈 판 사이에 이방원에게 뒤통수 맞고 여운을 남기며 끝난다.

이와 달리 <징비록>은 위기를 겪고 그 위기가 제대로 해소가 안 된 상태에서 또 다른 위기를 맞는다. 이게 드라마 시작부터 끝까지 반복한다. 드라마 내내 제대로 되는 일이 없다. 위기가 해소되기 전에 또 다른 위기를 맞으니 극의 피로도는 높아지고 재미는 떨어진다. 주인공이 고난을 이겨내며 성장하는 게 아니라 드라마 내내 고생만 하다 드라마가 끝난다. 시청자가 드라마를 보다가 지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건 각본의 문제가 아니라 역사적 사실 자체의 문제라 각본을 고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조선개국의 두 축은 이성계의 무력과 정도전의 정치력이다. 그래서 <정도전>은 정도전의 정치력만큼이나 이성계가 얼마나 무장으로서 출중했는지를 보여주어야 했고, 그래서 전투 장면에 나름대로 공을 들였다. 황산전투나 위화도 회군 때 벌어진 개경 시가전도 그렇고, 최영과 이성계의 칼싸움도 그렇다. 이는 드라마의 볼거리에 큰 역할을 했다.

이와 달리 <징비록>은 조선군의 무력과 류성룡의 정치력의 균형이 맞지 않았다. <정도전>은 주인공이 이성계와 정도전이니까 각자 역할을 잘 하면 되는데, <징비록>은 주인공이 류성룡이기 때문에 전투를 부각시키면 주인공 비중이 줄어들어 극 전체의 균형이 흔들리기 쉽다. 이순신 역할을 김명민이 맡았더라면 드라마는 <징비록>으로 시작해 <난중일기>로 끝나는 참사를 맞았을지도 모른다(그래도 김석훈은 좀....). 그렇다고 <징비록>이 류성룡 원톱이 아니라 류성룡-이순신 투톱으로 만들었다면 정치 드라마로서의 면모는 사라지고 기존의 드라마처럼 고독한 두 영웅의 이야기로 머물렀을 것이다. 이렇게 해도 안 되고 저렇게 해도 안 되는 난처한 상황이다.

(물론 <징비록>의 전투 장면이 미비했던 건 맞다. <불멸의 이순신>은 하다못해 천자총통이 어떻게 안택선을 때려 부수는지를 보여주었는데, <징비록>은 전투도 대부분 대사로 처리된다. “아니, 용인에서 조선군이 대패를 했단 말이냐?” 하는 식이다. 심지어 명량해전에서는 판옥선도 나오지 않았다. 이러한 전투 장면의 비중을 조금 늘린다고 해서 드라마의 균형이 깨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예산상의 문제 때문에 전투 장면이 축소된 것이 아닐까 싶다.)

그래도 나는 다른 방법이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정도전>은 등장인물이 입체적이다. 주인공 정도전만 해도 초기(객기 부리는 선비), 과도기(귀향 가서 개고생), 중기(혁명가), 후기(노회한 정치가)로 진행되면서 캐릭터가 변한다. 반면 <징비록>은 인물들이 평면적이다. 류성룡은 너무 비현실적으로 드라마 내내 착하고 백성만 생각하고 자기 파벌은 생각도 안 한다. 이순신은 사이코패스 아닌가 싶을 정도로 감정 변화가 없다.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도 매우 다양한 모습을 보이는데, 류성룡은 너무 한 면만 보여줘서 극의 재미를 반감시킨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이러한 한계를 감안하더라도, <징비록>은 <정도전>만큼은 아니더라도 괜찮은 드라마다. 주몽이 고구려를 건국한다는 것 빼고는 다 뻥인, 그러면서도 극의 개연성도 없는 <주몽>이나, 주인공이 등장해서 하는 일이라고는 눈 부라리고 소리 지르며 “뭐야?”를 다양한 방식으로 발음하는 <여인천하> 같은 드라마와 비교한다면, <징비록>은 한국 드라마가 많이 발전했음을 보여주는 사례 중 하나일 것이다.

(2015.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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