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0년 전 중국에서 장각이 백성들을 꼬드긴 방식이나 이지성이 사람들을 꼬드기는 방식이나 비슷하다. 남화선인에게 책을 얻은 장각은(인문고전을 읽은 이지성은), 태평도를 믿으면 병도 낫고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했다(인문고전이 만병통치약이라고 했다). 태평도를 믿고도 병이 낫지 않은 사람들이 있으면(책을 읽어도 별로 똑똑해지지 않는 사람이 꽤나 많은데) 이는 진심으로 태평도를 믿지 않아서라고 했다(절절한 마음으로 인문고전을 읽지 않아서라고 했다). 장각은 창천의 시대가 가고 황천의 시대가 오고 있다면서(이지성은 노예를 만드는 교육의 시대가 가고 인문고전의 시대가 온다면서), 모든 백성들이 들고 일어나 한나라를 무너뜨리자고 했다(모든 국민들이 인문고전을 손으로 필사하고 외우자고 했다).
이처럼 장각이나 이지성이나 혹세무민하는 방식은 비슷한데, 왜 이지성은 장각처럼 난을 일으키지 않는가? 지금이 2세기가 아니라 21세기이기 때문이다. 황건적의 난에 가담한 백성이나 이지성의 책을 읽고 감명받는 사람이나 지적인 능력 자체는 비슷할 것이다. 태평도를 믿으면 병이 낫는다고 믿는 사람이나 “인문고전은 두뇌의 산삼”이라고 믿는 사람이나 무엇이 다르겠는가? 이지성이 난을 일으키지 못하는 것은 각 개인의 능력이 달라져서가 아니라 인류가 사회를 구성하는 능력이 달라졌기 때문일 것이다.
개인의 도덕성이라든지 의식의 각성이라고 하는 것들도 마찬가지다. 몇 백년 전에는 고문이 합법적인 심문 방법이었던 것과 달리, 오늘날 문명국가는 고문을 금지한다. 심지어 일제강점기에도 고문은 불법이었다, 이는 오늘날 사람들이 몇 백년 전의 사람보다 도덕적 능력이 더 뛰어나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능력을 보여주는 것이다. 부여는 나라에 큰 재해가 있으면 왕을 쫓아냈지만, 오늘날 한국은 큰 가뭄이 들어도 대통령을 쫓아내지 않는데(물론 그러한 미풍양속을 되살려야 한다는 소수 의견도 있다), 이는 오늘날 한국 사람들이 부여 사람들보다 현명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쓰는 도구(과학적 지식)가 부여 사람들의 것보다 좋기 때문이다.
인류의 사회적인 역량이 발전해왔기 때문에, 혹세무민하는 사람들이 나타나도 천하를 혼란하게 하는 대신 출판시장을 혼란하게 하는 선에서 멈춘다. 인류에게 희망이 있다면 그건 개인의 도덕성이나 지적능력이 아니라 개인 능력으로 환원되지 않는 사회적인 역량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나는 개인의 가능성은 믿지 않지만 인류의 가능성은 믿는다.
* 링크: [딴지일보] 40억 작가 이지성의 노하우 대탐구 (feat. <생각하는 인문학>)
(2015.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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