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0/24

혼돈의 대학원생 연구실 이사



아직도 대학원생 연구실은 이사 중이다. 한 달 넘게 연구실 이사가 끝나지 않고 있다.

학과에 신임 교수가 부임하면서 대학원생 연구실 중 하나를 옮기게 되었다. 기존 교수가 퇴임하고 신임 교수가 부임하는 게 아니라 아예 자리 하나가 새로 만들어진 상황이라 교수 연구실이 새로 필요했다. 학과에서는 단과대로부터 옆 동 2층의 공간 하나를 추가로 배정받았다. 다른 교수 연구실은 모두 붙어 있는데 신임 교수만 외딴곳에 연구실을 줄 수는 없으니 교수 연구실끼리 붙어 있게 하고 대학원생 연구실을 다른 곳으로 옮기기로 했다. 대학원생 연구실이라고 해도 완전히 외딴곳으로 옮기는 것도 안 좋으니 자료실로 쓰던 같은 층의 공간을 대학원 연구실로 바꾸고, 새로 배정받은 공간을 자료실 겸 회의실로 개조해서 쓰기로 했다. 4층 대학원생 연구실 벽면을 도색하고 책장을 새로 설치하는 김에 같은 동 1층에 있는 연구실도 벽면 도색을 새로 하고 책장도 새로 설치하기로 했다. 학과에 공간이동 TF팀이 만들어졌고 몇몇 대학원생들이 여기에 참여했다.

처음에는 공간이동에 며칠 안 걸릴 것이라고 했다. 고려할 사항이 아무리 많다고 하더라도 의사결정에나 시간이 많이 걸리지, 가구 이동, 도색, 책장 설치 등에 시간이 오래 걸릴 이유가 있겠는가?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이사 가는 대학원생 연구실에서 사람들이 짐을 빼기 시작한 것이 7월 17일(월)이고 모든 짐을 다 빼낸 것이 7월 23일(일)이었는데, 짐을 다 빼내도록 책장을 언제 설치할지는 일정이 정해지지도 않았다. 8월 4일(금)이 되어서야 책장을 8월 10일(목)에 설치하기로 정했다. 연구실에 있는 짐을 빼내고 나서 책상을 옮기고 도색하고 책장을 새로 설치하는 데 왜 3주나 걸리는지, 왜 미리 일정이 다 정해진 것이 아니라 중간에 정해지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그냥 그런가 보다 했다. 진짜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8월 10일(목) 연구실 벽면에 설치된 선반형 책장을 보고 깜짝 놀랐다. 마감도 안 된 널빤지를 벽에 달아놓은 것이었다. 너무 허름해서 ‘빨리 졸업해서 여기에서 나가라고 이렇게 만들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허름한 것은 둘째치고 합판이 너무 얇았다. 책을 몇 권 올려놓지도 않았는데 합판이 크게 휘었다. 웃음이 나왔다. 웃음을 멈추고 싶었는데 웃음이 계속 나왔다. 조커가 된 것 같았다.



TF팀에 참여한 대학원생들도 새로 설치된 책장을 보고 놀랐다. 뭔가 잘못된 것 같다는 TF팀의 지적에 설치 작업을 하던 인부들 중 책임자로 보이는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 “저희는 주문하신 대로 설치한 겁니다.” TF팀 대학원생이 기존에 설치된 책장과 동일한 것을 주문했다고 말하자 책임자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했다. “그러면 주문을 잘못하신 거죠.” TF팀 대학원생은 현장 책임자에게 정중하게 문제점을 지적했지만, 현장 책임자는 웃으면서 답했다. 주문한 대로 설치하는 것뿐이며, 사진에 나온 것과 같은 제품이며, 마감이 안 되어있다고 미리 말했었으며, 원래 책장은 휘게 마련이며, 책 무게를 충분히 지탱할 수 있다는 것이다.

도대체 주문을 어떻게 한 것인가? 책장을 주문한 당사자는 마침 이탈리아로 여행 가서 현장에 나올 수 없었다. 나는 TF팀의 다른 대학원생들에게 어떻게 된 일인지 물어보았다. TF팀의 다른 대학원생들은 자기가 맡은 일만 알고 다른 사람이 맡은 일은 알지 못했다. 여러 가지로 신경 써야 할 것이 많아서 다른 사람이 맡은 일은 모른다고 했다. 일을 총괄 정리하는 사람이 있느냐고 물으니 없다고 답했다. TF팀의 사람들끼리 회의를 여러 번 했다고 하는데 아마도 어떤 일을 어떻게 배분하고 처리할지 정도만 알고 있는 듯했다. 일이 벌어지기 전까지 구체적인 주문 내역은 모른 채 기존 책장과 동일한 것으로 주문했다고만 알고 있었다.

잠시 후 책장을 주문한 대학원생이 파일로 자료를 보냈다. 제품 정보를 알아보는 과정에서 업체 직원과 나눈 대화(카카오톡 메시지)와 업체가 보낸 견적서였다.

대학원생과 업체 직원이 나눈 대화 내역을 보았다. 책장을 주문한 대학원생은 이전에 벽면에 설치되었던 선반형 책장의 사진을 보내며 새 책장이 그와 동일한 것이어야 한다는 것과 책의 무게를 충분히 지탱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을 업체에 분명히 밝혔다. 업체에서는 그렇게 하겠다고 하면서 다만 가격상 마감이 좀 안 된 것은 이해해야 한다고 했다. 여기까지는 문제가 없었다.

견적서 파일을 보았다. 견적서에는 ‘합판’이라고 되어있었고 합판의 길이와 너비만 써있었을 뿐 두께는 써있지 않았다. 나는 옆에 있던 TF팀 대학원생에게 왜 견적서에 합판 두께가 안 나와 있느냐고 물으니, 원래 견적서에 합판 두께는 없었다고 답했다. 표정을 보니 무엇이 문제였는지 아직 모르는 듯했다. 나는 TF팀 대학원생에게 모델명 같은 것은 확인했는지, 견본은 받아보았는지 등을 물었다. TF팀 대학원생은 모델명 같은 것은 애초에 없었고 견본은 받지 않았다고 답했다. 그렇게 대답하고는 표정이 어두워졌다.

업체 직원의 말이 맞았다. 업체는 주문받은 대로 납품했다. 그런데 학생이 착오하여 주문을 잘못한 것이 아니었다. 업체가 모든 상황을 뻔히 알면서도 순진한 대학원생을 호구로 잡아서 잘못된 주문을 넣게 한 것이다.

상황은 대강 다음과 같이 재구성될 수 있다. 학과에서 무슨 이유에서인지 책장에 들어갈 비용을 크게 줄이라고 했다. 내가 TF팀에 있었던 것은 아니므로 정확히 어떤 상황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예산 자체가 부족한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 TF팀의 대학원생은 책장을 주문하기 위해 업체 네 곳을 알아보았다. 업체 세 곳은 400-500만 원이 든다고 했고 업체 한 곳만이 학과에서 제시한 200-300만 원에 제품을 납품할 수 있다고 했다. 담당 학생은 연구실 책장이 갖추어야 하는 조건을 모두 밝혔고, 업체는 학생의 요구를 다 수용하는 척하면서 합판의 두께를 안 적은 견적서를 보냈다. 담당 학생은 견적서에서 어떤 것이 빠졌는지 알아채지 못했고 다른 학생들도 그 학생의 말만 듣고 기존의 것과 동일한 책장을 주문한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렇게 합판이 마치 책장인 것처럼 벽에 설치되었다.

업체는 학생이 주문하고자 한 책장이 어떤 것인지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 회사의 블로그에 게시된 책장 사진에는 학생이 보낸 사진과 똑같은 멀쩡한 책장이 있었으니 업체 사람이 모르고 제품을 잘못 보낸 것도 아니다. 기존 책장은 두께가 2.5-3센티이고 새로 설치한 합판은 두께가 1.4센티이니 헷갈릴 수도 없다. 업체는 대학원생들이 잘 모르는 것을 이용하여 주문을 잘못하도록 유도했고, 그렇게 주문받아 쓸 수도 없는 책장을 설치했다. 업체가 장사를 하루 이틀 한 것도 아니고 학생이 보낸 책장 사진도 받았고 홈페이지에 그와 똑같은 선반형 책장도 있었으니 처음부터 작정하고 등을 치려고 한 것임에 틀림없다.

4층 연구실에 책장인 척하는 합판을 설치하는 작업을 끝낸 인부들은 점심을 먹으러 갔다. 인부들이 점심을 먹고 오면 1층 연구실에도 합판을 설치할 테니 그 전에 작업을 중단시켜야 했다. 그런데 작업을 중단시키는 권한이 TF팀 대학원생에게 있는 것도 아니어서 일단은 A 교수에게 보고해야 했다. 웬만한 상황이면 모르겠는데 일이 단단히 잘못 돌아가고 있는 것 같아서 나도 TF팀 대학원생을 따라 A 교수 연구실에 갔다. TF팀 대학원생은 매우 송구스럽다는 듯이 상황을 설명하는데 A 교수의 대답이 너무도 놀라워서 내 귀를 의심할 정도였다. “그래서 나보고 어떻게 하라는 거야? 주문은 너희가 했잖아.”

나는 순간 A 교수가 MZ 세대인 줄 알았다. “알빠노”를 면전에서 듣다니. 어안이 벙벙했다. 도대체 MZ 세대를 왜 욕하는 걸까? 머리가 허연 교수도 “알빠임? 누가 그렇게 주문하라고 칼 들고 협박했음?” 이러는데.

나는 A 교수의 대답을 듣고서야 왜 TF팀의 일 처리가 그 모양이었는지 깨달았다. 학생들 보고 알아서 하라고 맡겨놓았고 누구에게 어떤 권한이 있는지도 정리해놓지 않았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업무를 총괄할 수도 없었고 책임질 수 없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나는 사회생활 경험이 없기는 하지만 보고를 받는다는 것은 그 사안에 대한 책임을 진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직장인들에게 전해들은 적이 있다. 이 경우는 반대로 책임을 지지 않기 위해 교수가 보고를 안 받기로 한 것이다. 교수가 보고를 안 받고 학생들보고 알아서 하라고 하니 지휘 체계나 의사결정 체계가 망할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 일개 대학원생이 학과 공간 재배치 작업의 책임을 지겠다, 업무를 총괄하겠다며 나설 수도 없다. 직장 경험 없는 초짜들만 모아놓았는데 여기서 작업을 총괄하겠다는 건 자살 행위다. 그렇게 공간 재배치에 필요한 업무를 사람마다 쪼개서 처리했고 다른 사람이 어떤 일을 맡았는지만 알았지 실제로 어떻게 했는지는 모르게 되어 결국 이 난리가 난 것이다.

A 교수의 처방은 다음과 같다.

(i) 업체와 싸우지 말 것. 이미 돈을 냈으니 우리가 갑이 아니라 업체가 갑이 된 상황임.

(ii) 보완책을 찾을 것. 책장 선반이 너무 얇다면 하나를 덧대거나 밑에 쇠를 받치거나 등등.

(iii) 학생들이 주문했으니 학생들이 알아서 해볼 것.

이게 다였다.

벽에 붙은 합판은 습기에 취약했고 이미 뒤틀릴 대로 뒤틀려서 합판을 하나 더 달든 밑을 쇠로 받치든 사용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든 말든 A 교수는 태평했다. 교수 연구실에 외부 손님이 왔다고는 하나 상황이 이 정도면 문제가 심각하다고 생각할 법도 한데, A 교수는 대학원생 연구실에 책장이 어떤 식으로 설치되었는지 보려고 하지도 않았다.

애초에 내가 생각했던 것은 A 교수를 앞세워 업체와 협상하는 것이었다. 업체가 작정하고 사기 비슷한 것을 쳤는 데다 이미 두 연구실 중 한 곳에 책장 설치까지 완료했고 TF팀 대학원생에게는 별다른 힘도 없고 권한도 없으니 업체와 협상하기 어려워 보였다. 주어진 상황을 최대한 잘 활용하여 업체와 협상할 수 있는 사람은 교수라고 판단하여 교수에게 상황을 보고하고 해결책을 찾으려고 했던 것이다. TF팀에도 참여하지 않은 내가 왜 A 교수를 찾아왔는지 그 취지를 설명하자 A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그러니까 너희들이 하기 싫은 말을 나보고 대신해달라는 거잖아. 너희가 주문했으니까 너희가 해야지.” 교수를 통한 협상이 글러먹었으니 내가 업체와 협상하고 사후에 교수의 허락을 받는 식으로 해야겠다고 판단했다. A 교수에게 오늘 학교에 계속 계시냐고 물으니 A 교수는 3시에 나가야 한다고 했다.

다른 대학원생들하고 점심을 배달시켜서 먹고 있는데 학과장인 B 선생님이 학생들을 보고는 일이 잘 되었냐고 물으셨다. TF팀 대학원생이 복도 쪽으로 나가 B 선생님께 사정을 말했고 B 선생님이 A 교수를 만나 이야기를 해서 결국 점심식사 후 다 같이 1층 연구실로 가기로 했다.

1층 연구실로 가니 이미 책장 설치가 상당 부분 진행된 상태였다. B 선생님이 연구실로 들어가 현장 책임자에게 사정을 말했다. 역시나 현장 책임자는 대학원생에게 말했던 것과 똑같은 말을 했고 B 선생님으로서도 어쩔 수가 없는 상황이라 잘 부탁한다고만 했다. 복도에 서 있었던 A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돈 들여서 하는 건데 잘 해야지. 이상하게 하면 나중에 또 뭐라고 욕할 거 아니야?” 이상하게 되면 나중에 욕할 것은 알았던 것이다.

그 날 나는 혹시라도 내가 교수가 된다면 절대로 저렇게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건물을 새로 짓는 것도 아니고 연구실 이사 좀 하는데 책임을 져봤자 얼마나 진다고 일을 이렇게 만들어놓는다는 게 말이 되나? 설사 책임을 진다고 한들, 돈을 물어내라고 하겠나, 감옥에 보내겠나, 청문회에 서라고 하겠나? 책장을 주문한 대학원생 말고 다른 한 명만 그 견적서를 보고 견적서에 왜 두께가 빠졌느냐고 묻기만 했어도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벽지나 바닥재 담당 학생은 견본을 본 다음 주문했으므로, 업무를 총괄하는 학생 하나만 정해놓았더라도 책장 담당 학생에게 견본을 받아보라고 했을 것이다.

결국 책장을 새로 설치하기로 했다. 이번에는 견적서에 책장 두께도 포함되었고 견본도 받아보았다. 이 과정에서 B 선생님이 업체와 이야기를 잘 해서 얼마를 깎았다고 한다. 그렇게 8월 21일(월)에 책장이 정상적으로 설치되었다.




책장이 설치된 그 날 밤, 나는 집에서 맥주 세 병을 마시고 연구실에 갔다. 그 다음날 일이 있어 법원을 가야 하니 밤에 연구실을 청소하고 콘센트에 멀티텝을 꽂은 뒤 다른 연구실에 두었던 내 짐을 모두 가져다 놓으려고 했다. 혼자서도 할 수 있는 일이라 굳이 다른 사람을 동원하고 싶지는 않았다. 책상과 책장과 바닥에 쌓인 먼지를 모두 닦은 뒤 콘센트에 멀티텝을 꽂기 위해 책상을 앞으로 당겼다. 그렇게 술김에 착한 일 좀 하려고 했는데 벽에는 콘센트가 없었다. 다른 연구실이었다면 양 벽에 각각 두 개씩, 창문 쪽과 문 쪽에 각각 한 개씩, 총 콘센트 여섯 개가 있어야 했다. 그런데 콘센트가 하나밖에 없었다. 도색 작업하기 전에 전기 배선 공사를 했어야 했는데 콘센트가 하나밖에 없다는 사실도 모르고 도색 작업을 한 것이다.

그 다음 날 아침, 법원 가는 길에 연구실에서 찍은 사진을 TF팀 대학원생에게 보내며 연구실에 콘센트가 여섯 개가 있어야 하는데 하나밖에 없다고 말하니 그 대학원생은 깜짝 놀라며 이는 고려하지도 못했다고 했다. 다음 주에 전기 배선 공사를 하기로 했다.

* 뱀발

학과 사람들과 영화 <오펜하이머>를 관람했다. 셔틀버스 타고 학교 밖을 나갈 때 마침 A 교수의 지도 학생하고 같이 버스를 탔다. 생각할수록 어처구니가 없어서 내가 “책임을 안 지려고 보고를 안 받는다는 게 말이 되느냐? 세상에 ‘알빠노’가 뭐냐? MZ 세대냐?”라고 말했다. 그랬더니 지도 학생이 “저희 지도 교수님을 편들려고 하는 것은 아니지만,,.”이라고 하면서 편을 들었는데, 간단히 정리하자면 의사결정 체계 때문에 이렇게 되었다는 것이다. 돈은 A 교수가 받아오고 학과장은 따로 있는 상황에서 학과장이 일을 맡을 수도 없고 A 교수가 일을 맡을 수도 없는 상황이라 대개는 대학원생 TF로 일을 진행한다는 것이다. 세세히 다 말하지 않더라도, 여기에는 한 번 일을 맡게 되면 해당 전공이 학과의 별별 일을 다 떠맡게 되리라는 것과, 그렇게 해서 고생하는 판에 그걸 또 다른 전공이 안 좋게 볼 수도 있다는 것이 깔려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다고 하면 앞으로 하는 일이 죄다 이렇게 된다는 것 아닌가? A 교수의 전공이 하는 일 중 하나가 다른 과에서 여러 전공 교수들끼리 의사결정을 못 내릴 때 의사결정 구조를 만들어주는 일이라고 해당 전공의 박사과정생에게 들은 적이 있다. 그런데 정작 소속 과에서는 책임을 덮어 쓸까봐 의사결정 체계를 못 만들고 보고도 안 받고 교수가 “알빠노?” 이라는 게 말이 되며, 그까짓 대학원 연구실 이사하는 데 한 달이 넘게 걸리는 것이 말이 되나? 내 말에 해당 학생은 겸연쩍게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이런 문제가 생기는 걸 막은 가장 간단한 방법은 복지를 중단하는 거겠죠.”

나는 해당 학생이 딱히 할 말을 못 찾아서 얼결에 그렇게 말했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렇지만 그런 말은 하면 안 된다. 누군가가 악용하고자 하기만 한다면 악용할 여지가 너무 많은 말이기 때문이다. 복지라니. 누가 보면 거저 퍼주는 줄 알겠다. 과학철학 교수를 새로 뽑아서 연구실 마련하다가 이렇게 된 것도 아니고 자기네 전공 교수 한 명 더 뽑아서 그와 관련된 일을 하다가 이렇게 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된 모양인데 유감이다”라고만 해도 충분하다. 나는 해당 학생의 선의를 믿지만 적절한 언사는 아니었다고 본다.

학과에 해당 전공이 추가된 이후로 들어오는 돈이 더 많아진 것은 알겠다. 그런데 다른 전공의 누군가가 “그래? 그러면 그깟놈의 복지 중단하자. 내가 머리가 나빠서 연구를 못 하지 돈이 없어서 연구를 못 하냐?”라고 하면 뭐라고 답할 것인가? 복지라고 해봐야 외국처럼 생활비를 주는 것도 아니고 학비 감면하고 소주 대신 와인 먹는 것 정도이다. 나야 거지 새끼가 맞지만 학과의 대학원생 중 상당수는 생활이 여유롭다. 학생들 중 상당수는 방학 때 이탈리아를 가네 프랑스를 가네 그러고 있다. 복지 중단한다고 그 사람들이 그렇게 타격을 받을 것 같은가? 악의를 가진 달변가가 선동하며 돌아다니고 몸을 숨긴 바람잡이들이 바람을 잡으면 어쩔 것인가? 대학원생 나부랭이가 불만을 가지든 말든 그게 무슨 인과력을 가지겠느냐만, 복지를 중단한다고 하면 바짓가랑이라도 붙들 것 같은가?

돈으로 친구를 살 수 없다고들 말하는데 돈을 쓰면서 의심과 경계심을 사는 건 어리석은 일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학과에서 혜택을 받는 사람들이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이게 해야지 녹차를 먹으면서 이게 녹차 먹인 돼지가 먹는 그 녹차가 아닌지, 내가 녹차 먹는 그 돼지인지 의심을 품으면 되겠는가?

하여간, 영화 <오펜하이머>를 보러 영화관에 들어가면서 나는 셔틀버스를 같이 탔던 다른 대학원생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과학학과에 오펜하이머 같은 사람이 있었다면 연구실 이사가 한 달이나 걸리지 않았을 텐데. 그런데 오펜하이머 같은 사람이 교수로 있어야지 학생으로 있으면 안 되겠네요. 어느 교수 책상 위에 사과가 있을 테니까.”

(2023.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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