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4/15

단편 소설 구상 - 국민들의 망상을 제거하는 국가

내가 소설은 거의 못 읽는 데다 영화 같은 경우도 SF는 웬만하면 안 좋아하기 때문에 잘 모르기는 하는데, 영화나 소설에 나오는 미래의 독재 정부는 과학기술에 기반하여 정보를 통제하거나 일부러 이상한 정보를 흘리는 우민화 정책을 쓰는 식으로 묘사된다고 들었다. 우민화 정책을 쓰는 정부가 나쁜 건 맞는데, 반대로 아예 이상한 생각을 할 여지가 없게 만드는 정부는 좋은 정부일까? 그런 정부가 정말 좋은 정부라고 해도, 그런 나라에서 사는 건 좋을까?

대충 다음과 같은 상황을 상상해보자. 엘리트가 대중을 계몽한다고 하면 너무 재수 없어 보이는 데다 불필요한 저항까지 불러일으킬 수 있으니 대중 문화 같은 데 티가 안 나게 적절하게 개입하는 사회가 있다고 하자. 인간 본연의 나약함 때문이든 어리석음 때문이든 망상은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나기 마련인데, 그러한 망상을 깨끗하게 없애는 일을 담당하는 정부 부서가 있다고 해보자.

가령, 안중근 의사의 사형판결일(2월 14일)에 발렌타인 데이랍시고 이성에게 초콜릿을 선물하는 것은 일본 기업이 만든 상술에 놀아나는 것이라며 온갖 염병을 하는 사람들이 있고, 그런 사람들을 이용하여 한 밑천 해먹는 사람들이 있다고 치자. 망상하며 즐거워하는 사람들 앞에서 옳고 그름을 따진다는 것은 무의미하다. 어떤 종류의 잘못된 판단은 그렇게 판단하는 사람에게 즐거움을 주기 때문에, 그러한 판단이 잘못되었음을 명백하게 밝힌다고 해도 이를 쉽게 받아들이려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런 사람들을 이용하여 먹고사는 사람들은 더더욱 저항할 것이다. 누구를 대상으로 토론을 할 것이며 설득을 할 것인가? 캠페인을 한다고 한들 무슨 영향력이 있을 것인가? 그런데 해결 방법은 매우 간단하다. 법적・기술적 근거만 뒷받침되면, 발렌타인 데이 사형판결일 망상 같은 것은 몇 주 만에 한국 사회에서 없앨 수 있다.

발렌타인 데이에 초콜릿을 못 받은 인기 없는 어떤 남성이 댓글창에 발렌타인 데이 안중근 어쩌고 하면서 염병하는 댓글을 단다고 하자. 그러한 댓글을 달았다는 기록이 남고, 그러한 데이터를 분석하여 그 다음날부터 정부의 긴급 문자처럼 하루에 한 개씩 문자가 간다. 띵동 하는 소리가 나서 휴대전화를 보면 그 날 어떤 독립운동가가 체포되었고 판결받았고 처형되었는지를 알 수밖에 없게 된다. 모든 사람에게 그런 문자가 가는 것이 아니라 망상에 젖은 것으로 보이는 사람만 겨냥하여 맞춤형 문자를 보낸다.

그렇게 매일 알려줄 뿐만 아니라, GPS를 이용하여 그 사람이 숙박업소나 관광지에 있으면 추가로 맞춤형 긴급 안내 문자도 보낸다. 가령 “애인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 전에 오늘 조선 수군이 칠천량에서 궤멸당했다는 사실을 되새기는 것은 어떨까요?” 하는 식으로 보내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몇 주만 하면, 아무리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발렌타인 데이 사형판결일 어쩌구 하는 것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주접에 불과한지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망상 비즈니스로 먹고사는 교수와 자칭 연구팀도 금세 없어질 것이다.

그런데 이런 사회에 살고 싶다고 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 같다. 나의 개인 정보를 망상을 제거하는 것 이외의 목적으로는 악용하지 않는다고 해도, 정부에서 우주방어급 보안 프로그램을 갖추고 있어서 절대로 해킹당할 수 없다고 해도, 망상에서 벗어날 때 드는 수치심이 그렇게 크지 않다고 해도, 워낙 복지가 잘 된 나라여서 망상 비즈니스로 먹고사는 사람들이 주저없이 자기들의 사업을 포기할 수 있다고 해도, 그런 사회에 산다는 것은 찜찜할 일일 것 같다.

망상에서 벗어나 나의 모습을 그대로 마주하게 될 때의 불쾌함을 상상해보자. 자신의 정신 건강을 보호하기 위해 망상에 젖은 망한 남자에 불과함을 자각하는 것은 망상에 젖어사는 것보다 정말 나은가? 망상에서 빠져나온다고 한들 능력남이 되는 것도 아니고 매력남이 되는 것도 아닌데? 국가나 정부는 내가 2월 14일에 지랄맞게 구는 것은 안중근 의사의 사형판결일을 엄숙하게 지키는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그저 여자에게 초콜릿을 못 받는 사람을 스스로 인정하게 만들어도 되는가? 나는 망상에 빠질 권리가 없는가?

혹시라도 내가 단편 소설을 쓰게 된다면, 이런 종류의 SF를 쓸 수도 있을 것 같다.

(2023.0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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