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과 콜로키움이 끝난 뒤 저녁식사를 할 때 옆 탁자에 앉은 과학정책 전공자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이공계 학부 출신인 과학정책 대학원생이 책읽기 모임을 했을 때의 이야기였다. 해당 책모임의 구성원 중 상당수는 이공계 출신이었는데, 그들 중 누군가가 좋아하는 수에 대하여 말하니 같이 있던 이공계 출신들도 다들 자기가 좋아하는 수를 말하고 좋아하는 이유를 말했고, 그걸 듣고 있던 문과생 출신이 그 모습을 보고 당황했다고 한다. 나도 그 이야기를 듣고도 어벙벙했다. 특정 수에 특별한 감정을 가진다는 것은 무엇일까? 수에 대해 내가 가지는 감정이란, 통장 잔고가 큰 수였으면 좋겠다는 것과 펀드 수익률이 큰 수였으면 좋겠다는 것뿐이다.
그런데 특정 수에 애틋한 감정을 가진다는 것이 그렇게까지 이상한 것은 아니다. 고대로 올라가면, 동양이든 서양이든 수에 대해 의미를 부여했다. 아마도 수를 다루는 사람들은 자기가 다루는 수에 대해 자기도 어떠한 감정을 가지게 되었을 것이고, 고대인들의 수에 대한 감정이라는 것도 인간 본연의 수에 대한 원초적 감정 비슷한 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한 감정을 가지게 되는 수가 무작위적인 것도 아니다. 완전수, 소수, 파이, 자연상수 등으로 좁혀진다.
내가 이공계 출신들의 이야기를 듣고 떠오른 것은 주역이었다. 주역에 대한 해석은 크게 의리역과 상수역으로 나뉜다고 알고 있다. 내가 주역에 대하여 정통으로 뭘 배운 적은 없고 들은 것이라고 해봐야 똥 같은 교양 강의 정도밖에 없어서 사실상 아는 것이라고는 거의 없지만, 그래도 의리역은 괘나 효의 상을 보고 거기에 숨어 있는 음약이나 강유 등을 풀이하는 것이고 상수역은 점괘에 있는 수를 가지고 뭘 하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주역은 64괘 384효로 되어 있고 그에 대응되는 괘사나 효사가 있을 테니 그런가 보다 할 텐데, 양수가 어떠니 음수가 어떠니 하는 것은 뭐 하러 있는 것인지 아예 신경도 안 썼는데, 이공계 출신들의 이야기를 들으니, 아마도 수를 접하고 다루는 사람들의 원초적인 감정 같은 것과 연관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보면, 이공계 출신들이 동양철학을 한다든지 한다면, 생-문과 출신들이 간과했던 것을 보거나, 아니면 체감하기 못했던 부분을 포착할 수도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고대의 지식인들은 지금처럼 문과/이과가 나뉘지도 않았을 것이고, 다산 정약용이 주역 해석을 두고 벌이는 경합(정민 교수의 『다산 선생 지식경영법』에 나온다)도 의리역이 아니라 상수역을 가지고 하는 것인 것을 보면, 당대 사람들이 느꼈을 법한 감정에 근접하는 데는 오히려 이과생이 더 유리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2022.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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