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1/30

등기권리증을 보고

대학원 연구실에서 부동산 증여계약서와 소유권이전등기 신청서를 쓰다가 옆에 있던 동료 대학원생에게 등기권리증을 본 적이 있는지 물어보았다. 소유권이전등기 신청서에 등기권리증에 적힌 정보를 옮겨적던 중 동료 대학원생이 등기권리증을 본 적이 있는지 궁금하여 물어본 것이었다. 올해 서른 살인 동료 대학원생은 아직 등기권리증을 본 적이 없다고 했다.

나는 동료 대학원생에게 등기권리증에 대해 간략히 설명했다. 등기권리증에는 권리자의 주민등록번호와 주소, 부동산의 소재지, 부동산 고유번호가 써 있고 그 밑에 등기필정보 보안스티커가 붙어있다. 스티커 위에는 “권리자 본인의 허락 없이 이 스티커를 떼어내거나 일련번호 또는 비밀번호를 알아낼 경우 관계 법령에 따라 민형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라는 경고문이 있고, 그 스티커를 떼어내면 일련번호와 비밀번호가 있다. 보안스티커를 붙였다는 건 그만큼 중요한 정보라는 것이다. 소유권이전등기 신청서 1면에는 해당 부동산의 소재지, 지목, 면적을 쓰는데 그건 토지대장만 발급받아도 알 수 있는 정보다. 2면에는 부동산 고유번호, 일련번호, 비밀번호를 쓰는데 이는 등기권리증에만 나오는 정보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등기권리증이 빼앗기면 그 땅은 남의 땅이 된다는 것이다. 어렸을 때 드라마에서 도박하다가 땅 문서 들고 가는 장면이 나오는 것을 보고 땅 문서를 빼앗기면 왜 땅을 빼앗기는 것인지 궁금해했는데, 커서 등기 신청을 하면서 어떤 절차를 거쳐 그렇게 되는지 알게 되었다.(물론, 땅 문서만 있으면 안 되고 인감 도장과 인감 증명서도 있어야 한다.)

내가 등기권리증을 처음 본 것이 스물여덟 살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처음에 본 것은 등기필증이었고 내가 혼자서 증여절차를 밟고 나서 등기권리증을 받고 나서야 처음 등기권리증을 보게 되었다. 그 당시 우리집은 내가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망할 상황이었다. 그냥 경제적으로 조금 어려워진다 싶은 상황이 아니라 정말 집이 날아갈 뻔했고, 내가 적절한 시점에 적절한 조치를 취해서 그 집이 지금까지 남아 있다.

등기권리증에 등기원인 및 일자는 “2012년 04월 02일 증여”, 등기일은 “2012년 5월 22일”이라고 써 있다. 여기서 두 가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하나는 등기하는 데 걸린 시간이다. 무려 한 달 보름이 넘게 걸렸다. 등기 신청만 정상적으로 하면 등기가 끝날 때까지 일주일밖에 안 걸린다. 내가 혼자서 등기를 해보겠다고 덤볐다가 그렇게 된 것이었다. 그 때 관공서를 여러 번 오가면서 ‘이럴 줄 알았으면 법무사를 쓸 걸’ 하고 후회를 많이 했는데, 그러면서도 나름대로 얻는 교훈이 있었다. 그 당시 내가 어떤 생각을 했느냐면, 혹시라도 내가 돈을 많이 벌고 자식도 낳는다면, 자식에게 20대 때 혼자서 증여 절차를 밟게끔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혼자서 증여 절차도 못 밟을 정도로 능력 없는 자식은 재산을 물려받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다른 하나는 등기 시점이다. 그 때는 내가 대학원 석사과정 입학 시험을 보기 직전이었다. 첫 번째 입학 시험에서 떨어진 다음, 집의 일을 처리하고 나서, 두 번째 입학 시험 때 붙어서 철학과 석사과정에 들어갔다. 공교롭게도, 집의 큰일을 다 처리한 이후에 대학원에 입학하게 된 것이었다.

사실, 석사과정에 들어간 이후라고 해서 집이 말짱했던 것도 아니었다. 2012년에 큰 위험을 제거하기는 했지만 이후에도 짜잔한 위기는 여러 번 있었다. 그 중 상당수는 내가 해결했다. 어쩌겠는가? 해결 방법이 내 눈에 보이고 내 손으로 해결할 수 있으니 내가 해야지. 아마 내가 공부를 매우 잘 해서 2012년 이전에 유학 갔으면 집이 확실하게 망했을 것이고, 내가 공부를 어정쩡하게 잘 해서 2012년 이후에 유학 갔어도 집이 온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집이 망해도 나 혼자 크게 성공하면 또 모르겠는데, 유학 실패하고 집에 돌아왔더니 집까지 망했으면 참 살맛이 안 났겠다.

나는 올해 소유권이전등기 신청서를 여러 개 썼고 시청과 등기소도 여러 번 갔다. 10년 전 기억이 자주 떠올랐다. 내가 이런 것을 왜 해야 하나, 내가 이런 것을 왜 알아야 하나, 하는 생각을 자주 했다. 물론, 10년 전과 올해는 상황이 다르기는 하다. 10년 전에 한 일은 망할 것을 안 망하게 하는 것이고, 올해 한 일은 잃어버린 것을 되찾고 빼앗긴 것을 되돌려받는 일이다. 그 일들을 처리하지 않는다고 해서 집이 망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올해 처리하지 않으면 영영 못 하게 될 것이 내 눈에 보이는데 그걸 가만히 둘 수도 없는 일이었다. 결국 또 내가 손을 댔고, 다 처리한 건 아니지만 웬만큼은 처리했다.

일이 거의 끝나가니까 안도감이 들어서 그랬는지 동료 대학원생에게 등기권리증을 보여주며 설명할 때에야 등기일자가 정확히 눈에 들어왔다. 이게 대학원 입학 10주년 행사도 아니고 뭔가 싶다. 대학원을 10년이나 다니는 것만 해도 한심한 일인데, 오래 다닌 것에 비해 딱히 실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박사학위 논문을 작성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언제 작성할지도 알 수 없으니 얼마나 한심한가? 도대체 나는 어쩌려고 이러고 있을까? 그런데 등기권리증에 써있는 등기일자를 보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웃으면서 동료 대학원생한테 이렇게 말했다. “내가 박사학위를 받기는 받으려나 보네. 10년 전에 그 고생을 하고 석사과정에 들어왔는데, 대학원 입학 10주년 행사도 아니고 이러는 거 보니까 이거 끝내고 박사학위 받겠네.”

이런 말도 안 되는 낙관은 어디에서 왔을까? 아마도 어머니에게서 왔을 것이다. 아들이 서른여덟 살 먹고 이러고 있으면 난리가 나야 정상인데, 어머니는 아직도 그냥 그런가 보다 한다. 시골은 풍속이 미개해서 나이 먹도록 결혼을 안 하면 큰일 나는 줄 안다. 어떤 아주머니는 나의 어머니에게 “결혼이 급하지 대학원을 다닐 때가 아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 아주머니는 대학원이 큰 학원 정도 되는 줄 아나 보다. 어머니는 그 이야기를 듣고 와서 시골 사람들이 무식해서 그런다고 그렇게 욕을 했다.

그래도 어머니도 약간은 불안한 모양이다. 정말로 하나도 안 불안하다면 그건 대범한 게 아니라 아픈 것일 게다. 10년 전 쯤에는 어머니가 나에게 이렇게 물었다. “너 좋다는 여자는 없니?” 나 좋아하는 여자가 없다고 간단하게 대답하면, 어머니는 “여자들한테 친절하게 좀 잘 해라”라고 말했다. 내가 불친절해서 이렇게 사는 건 아닌데, 하여간 어머니는 그렇게 믿었던 모양이다. 몇 년이 지나서 “너 좋다는 여자는 없니?”라는 물음에 내가 없다고 대답하자, 그제야 불친절이 원인이 아님을 알았던 것인지 어머니는 “교수 되면 결혼하겠지”라고 말했다. 그런데 내가 교수가 안 될 것 같아 보였던 것일까? 최근에 어머니가 “너 좋다는 여자는 없니?”라고 물었을 때 내가 없다고 답하자 어머니는 이렇게 말했다. “그래? ◯◯이가 어린 여자하고 결혼하려나 보네.”

어머니가 “◯◯이가 어린 여자하고 결혼하려나 보네”라고 하는 말을 듣고, 순간 나도 모르게 ‘어머니가 정상적인 판단을 할 수 없는 상태인가?’ 하고 의심했다. 그러나 다행히도, 다른 영역에서 비교적 정상적인 판단을 하시는 것을 보고, 나의 낙관적인 태도는 어머니에게서 온 것이겠다고 생각했다.

(2022.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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