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9/09

허준이 교수가 수학포기자라는 서사



허준이 교수의 필즈상 수상에 대한 언론 보도를 보면 흥미로운 구석이 보인다. 건조하게 사실만 보도해도 되는데 되든 안 되든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또 그러한 이야기가 일정한 유형을 따른다는 점이다. 기사 제목을 “허준이 교수, 한국인 최초 필즈상 수상”이라고 뽑고 허준이 교수가 어떤 연구로 필즈상을 받았는지, 필즈상 수상이 어떤 의의가 있는지, 필즈상이 어떤 상인지 보도하면 될 것인데, 그딴 건 다 갖다버리고 기사 제목을 “고교 중퇴 수포자, 수학의 노벨상 받다”, “구구단도 늦게 뗀 ‘수포자’, 수학계 ‘노벨상’ 안았다”, “고교 자퇴하고 PC방 다니던 ‘수포자’…수학계 노벨상 품었다”라고 달고 이야기를 지어낸다. 이야기의 구조도 어느 정도 정형화된 것이다. 어려서는 어느 누구의 주목도 받지 못하고 평범한 사람들에게도 뒤처지던 천재가, 어떤 계기로 자신에게 재능이 있음을 발견하고 뒤늦게 노력해서 숨겨진 천재성을 발휘해서 큰 성과를 이루었다더라는, 유치하지만 사람들이 좋아하는 구조로 되어 있다.

사실, 허준이 교수가 수학포기자라는 이야기는 과학자들의 위인전기에서 나오는 이야기와 매우 흡사하다. 위인전기에 나오는 과학자 치고 어려서 똑똑한 사람이 없다. 죄다 주변 사람들으로부터 멍청하다는 오해를 받고, 엉뚱한 짓을 하다 사고 쳐서 뒤지게 욕이나 먹고, 거의 사회부적응자처럼 지내다가, 사과 낙하 같은 아주 사소한 일에서 영감을 얻어서 위대한 업적을 남긴 것처럼 나온다. 물론, 그런 건 다 개뻥이다. 공부 못하는 학생들이 비관하는 것을 막으려고 그런 개뻥을 만드는지는 모르겠으나 하여간 개뻥이다. 과학사에 이름을 남긴 과학자들은 어려서부터 천재였고 태어날 때부터 천재였다. 마치 강호동이 어려서부터 장사였고 태어날 때부터 우량아였던 것과 같다. 위인전기에서는 마치 사과 나무만 없었다면 뉴튼이 보편중력의 법칙을 발견하지 못했을 것처럼 나오지만, 웨스트폴 같은 사람들은 전혀 다르게 말한다. 웨스트폴은 과학자들의 기록을 살펴보면서 자신의 역량이 해당 과학자의 역량의 몇 분이 1인이 대충 가늠하는데 뉴튼의 경우에는 그 분모가 무한대로 커지는 것 같다고 말했다.

과학자 위인전기가 개뻥으로 점철된 것은 그렇다고 치자. 위인전기가 얼마나 믿을만한 것인지 자료를 찾아보며 대조한 사람은 매우 드물 것이므로, 누군가가 선제적으로 개뻥을 치기만 하면, 웬만한 사람은 속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허준이 교수를 두고 ‘고교 중퇴 수포자’라고 이야기를 지어내는 것은 너무 안 그럴듯하지 않은가? 일단, 수학포기자가 서울대 물리학과를 들어갔다고 하는 것부터 말이 안 된다. 수학이 뭔지 모르거나 포기가 뭔지 모르지 않는 이상, 그런 것을 쉽게 믿는 것 자체가 이상하다. 게다가 고교 중퇴도 문제될 것이 아니다. 특목고 학생들도 대학 가는 데 고등학교가 걸리적거려서 자퇴하는 경우도 있다. 어느 대학을 가느냐가 중요한 것이지 그깟 놈의 고등학교를 다니냐 안 다니냐가 뭐가 중요하겠는가? 그런데도 언론에서 ‘고교 중퇴’와 ‘수포자’를 합쳐서 ‘고교 중퇴 수포자’를 만드니 사람들이 뻑 가는 것이다. 아마 정정 보도만 빨리 안 나왔으면 임춘애 선수가 라면만 먹고 달리기했다는 것과 쌍벽을 이루는 오보가 되었을 것이다.

허준이 교수가 수학포기자라는 기사를 보고 사람들이 뻑 가는 이유는, 아마도 사람들이 받아들이는 위인전기의 서사와 비슷하기 때문일 것이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이미 믿고 있는 사람은 그와 비슷한 이야기도 쉽게 믿을 것이다. 새로 접한 그러한 이야기에 뭔가 미심쩍은 부분들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미 믿고 있는 이야기의 큰 틀에 맞추어서 의심없이 받아들일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사람들은 새로 접하는 정보에 따라 자신이 믿는 이야기를 바꿀 수도 있겠지만, 이미 믿는 이야기의 서사에 맞추어 새로 접하는 정보도 왜곡하거나 누락하거나 무시할 수도 있겠다. 허준이 교수가 수학포기자였다는 이야기를 쓴 기자들도, 새로운 이야기를 만든 것이 아니라 이미 사람들이 믿는 이야기에 올라탄 것이다.

사람들이 어떤 것을 알고 있느냐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어떤 이야기를 사실에 가까운 것으로 믿고 있느냐일 수도 있다. 이렇게 본다면, 문학 쪽 일부 종사자들이 사회현상을 두고 서사 같은 소리를 하는 것이 (대체로는 말이 안 되지만) 아예 말이 안 되는 것은 아닐 수도 있을 것 같다.

(2022.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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