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지도교수님께서 작년 1학기부터 DGIST에서 교양 수업을 하신다. 원래는 내가 올해 1학기에도 조교 업무를 할 예정이었으나, 학교 규정상 같은 학생이 같은 교수의 수업에서 3학기 이상 연속으로 조교 업무를 할 수는 없다고 하여 이번 학기는 조교 업무를 하지 못했다. 선생님은 규정이 불합리한 것 같은데 어쩔 수 없다고 하셨다.
작년 1학기에는 이런 일이 있었다. 중간고사 이전에는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를 읽고 중간고사 이후에는 『쿤의 주제들』에 실린 논문을 학생들이 발제하기로 되어있었다. 학생 두세 명당 논문 한 편씩 발제하기로 했다. 선생님은 중간고사 끝나자마자 학생들이 논문을 발제할 것이므로 중간고사 이전에 자기가 어떤 논문을 발제할지 지원하게 했으면 좋겠다고 하셨다. 나는 구글스프레드를 이용하여 학생들이 어떤 논문을 지원할지 기록하게 해놓았고 조 배치까지 다 끝냈다. 이제 됐다고 생각했는데, 선생님께 전화가 걸려왔다. 중간고사 보고 나서 몇 명이 수강철회를 해서 조 구성원을 조정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선생님은 천천히 한참 설명하셨다. 요약하자면, 논문 한 편당 쪽수와 학생 수를 고려하여 상대적으로 분량이 적은 논문에는 두 명을 할당하고 분량이 많은 논문에는 세 명을 할당한 것인데, 몇 명이 수강철회를 하는 바람에 어느 조는 혼자서 논문 한 편을 발제를 하는 상황이 되었으니, 세 명이 한 조인 조 중에서 그나마 논문 분량이 적은 조에서 한 명씩 뽑아 혼자만 남은 조로 보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선생님은 어느 조에서 어느 조로 한 명을 보내야 하는지까지 다 생각해놓으셨다.
그러면 선생님이 한 명씩 지정해서 다른 조로 보내면 되는 것 아닌가? 그렇지 않다. 세 명 중 누가 다른 조로 갈지를 교수가 지정하면 공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학생이 자기가 발제할 논문에 대해 미리 읽어보고 준비했을 수도 있는데 교수가 임의로 어느 학생을 뽑아서 다른 조로 보내버리면 그 학생은 그 조의 다른 학생들보다 손해를 보게 된다고 선생님은 말씀하셨다. 맞는 말씀이다. 그렇다고 하여 조를 옮긴 학생에게 특혜를 주는 것도 옳지 않다고 선생님은 말씀하셨다. 이것도 맞는 말씀이다. 그래서 어떻게 하시겠다는 것인가? 선생님은 나보고 공정하게 인원을 조정하라고 하셨다. 선생님은 공평무사한 분이셨고 가끔 ‘저렇게 공평무사하면 (내가) 곤란한데...’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공평무사한 분이셨는데, 정년퇴임 후에도 공평무사하셨던 것이다. 그런데 내가 어떻게? 선생님은 알아서 방법을 찾아보라고 하셨다.
당시는 코로나19 때문에 전면 비-대면 수업일 뿐만 아니라 선생님이 수업하시는 학교도 서울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서, 나는 학생들과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다. 개인적인 인정으로 인원을 조정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나는 아무 권한이 없었다. 아무 권한도 없는 사람이 오직 학생들의 자발적 의사를 이끌어내어 인원을 조정한다면 그야말로 공정한 의사결정일 것이다. 그런데 그게 어떻게 가능한가? 선생님은 나를 시험하려는 것인가? 그건 아닌 것 같았다. 통화하면서 보니 선생님이 시험에 든 것 같았다.
나는 선생님이 말씀하신 기준과 조건을 다시 살펴보았다. 계속 보다 보니 선생님이 간과한 부분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선생님은 학생이 조를 바꿀 경우의 손익에 대해서만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에 남은 조원들의 손익에 대해서는 간과했던 것이다. 나는 그 점에 착안하여 해당 학생들에게 메일을 보냈다. 단 한 마디의 거짓도 없이, 있는 사실을 그대로 알려주는 것만으로도 문제가 해결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 보냈던 메일의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중간고사 이후 몇 명이 수강철회하여 조별 인원 조정이 불가피하다.
- 논문 분량상 당신이 속한 조에서 한 명은 다른 조로 가야 한다.
- 조를 바꾸면 원래 배정받은 논문을 발제하는 것보다 발제 준비 시간이 줄어든다.
- 그런데 조를 옮기면 발제해야 할 논문의 분량도 줄어든다.
- 같은 조의 인원들끼리 아무리 단합이 잘 된다고 해도 결국 각자 논문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고 내용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 조를 바꾸는 것은 온전히 개인의 자유 의사이며 어떠한 강제도 없다.
- 나는 똑같은 메일을 당신의 조원들에게 모두 보냈다.
- 조를 바꾸겠다는 사람이 두 명 이상일 경우 답장을 빨리 보낸 순으로 결정한다.
대충 이런 내용으로 메일을 쓴 뒤 수신확인을 하라는 카카오톡을 학생들에게 보냈다. 메일을 받은 모든 학생이 나에게 답장을 보냈다. 정직이 문제 해결의 기본이라는 것을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
문제를 해결한 다음 선생님께 연락드렸다. 선생님은 문제를 해결하자마자 바로 연락하라고 하셨는데 내 연락을 받고는 예상보다 빨리 문제를 해결했다고 말씀하셨다.
얼마 전 선생님께 연락을 받았다. 다음 학기에 조교 업무를 다시 하기로 했다.
(2022.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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