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 변화를 부정하는 사람들이 드는 논거 중 하나는 인간이 지구 기후를 바꿀 만큼 그렇게 대단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오르도비스기 대멸종의 원인으로 꼽히는 것 중 하나는 육상 식물의 번성이다. 당시 육상 식물이 얼마나 대단한 존재였길래 대멸종의 원인이 되느냐고 묻는다면 그냥 미친 놈이다. 그런데 그런 미친 소리를 듣고도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지 진지하게 고민한다면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믿기 어렵겠지만, 인류세를 다루는 논문들 중 일부는 정말로 진지하게 그런 이야기를 한다.
인간이 어떤 존재이길래 기후 변화를 일으키는지를 그렇게 진지하게 고민할 필요는 없다. 인간들이 어떻게 좀 잘 살아보겠다고 에너지를 쓰는데, 사람 수도 늘어나고 한 사람이 쓰는 에너지도 늘어나다 보니, 그 과정에서 온실 기체와 폐기물이 나오고 난장판이 난 것이다. 이것이 그렇게 대단한 설명이 요구되는 신비로운 현상인가? 설령, 인간이 탄소 기반 생명체가 아니라 실리콘 기반 생명체였더라도 먹고 사는 과정에서 온실 기체를 충분히 많이 내뿜었으면 기후 변화가 왔을 것이다. 인류세가 와서 곧 세상 종말 올 것처럼 말하는 사람들이 왜 한가하게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나 고민하고 있는가?
인간이 점점 에너지를 많이 쓰게 된 것도 그렇게 신기한 일이 아니다. 다른 사람이나 다른 집단보다 나나 내가 속한 집단이 에너지를 더 많이 사용하는 것이 생존에 유리하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뿐이다. 인간이 에너지를 점점 많이 쓰게 되었다는 것이 그렇게나 신기한 일이라도 되는 듯 심각하게 그 이유를 캐묻고 앉아있다는 것은 마치 “왜 사냐고 묻거든 쳐웃지요” 같은 소리나 하는 것이다.
인류학자 마빈 해리스는 인간이 왜 점점 더 많은 에너지를 생산하고 소비하게 되었는지를 설명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방정식을 소개했다.
E = m × t × r × e
• E: 식량 에너지 산출량. 한 체계가 1년 동안 생산하는 칼로리양
• m: 식량 생산자들의 수
• t: 1인당 노동 시간
• r: 한 사람이 소모하는 칼로리
• e: 식량 생산에 소비된 각 칼로리당 생산된 평균 식량 칼로리
마빈 해리스는 부시맨족, 감비아, 중국, 미국 등을 조사하여 수렵-채집, 원시적인 형태의 농업, 화전 농업, 전-근대 시기 관개 농업, 현대 농업의 생산성과 효율성 등을 비교했다. 네 가지 체계를 비교하면 몇 가지 경향이 나타난다. e가 높을수록 그 사회에서는 식량을 더 효율적으로 생산한다는 것인데, e가 높은 사회일수록 E는 커지고 t는 늘어나며 m의 절대 수는 늘지만 해당 사회의 전체 인구에서 m이 차지하는 비율은 줄어든다. 쉽게 말하면, 식량을 더 효율적으로 생산하는 사회일수록 1인당 노동 시간은 늘어나고, 식량 생산 인구의 비율은 줄어들며, 사회 전체의 식량 에너지 산출량은 커지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기술환경 효용성이 개량되는데도 왜 노동 시간은 줄어들지 않는가? 진화적 관점에서 볼 때, 노동력을 절약하는 식량 생산 기술이 나오면 식량 생산자의 노동을 절약하기보다는 전체 인구를 늘리는 데 우선적으로 이용된다는 것이 마빈 해리스의 설명이다.
전체 인구가 늘어나고 인구 밀도가 높아지면 더 복잡한 사회문화 체계를 이루게 된다. 식량 생산 인구의 비중이 줄어드는 대신 다른 업종 인구의 절대 수와 상대적인 크기가 늘어나기 때문이다. 부시맨들은 성인 인구의 100%가 식량 생산 과정에 직접 참여하지만, 저개발국에서는 성인 인구 중 60-65%가 식량 생산에 참여하고, 미국에서는 5% 미만만이 식량 생산에 참여한다. 그러면 나머지 사람들은 무엇을 하는가? 노는가? 아니다. 비-식량 생산 인구 중 대부분은 제조업, 서비스업, 행정, 관리직 등 다른 전문직에 종사하며, 소수만이 유한 계급이 된다. 심지어, 더 복잡한 사회 체계에서 사는 사람들은 단순한 사회에 사는 사람들보다 노동 시간도 더 길다. 더 많이 일하는 대신 더 많은 서비스를 누리는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들 것이다. e가 증가했다면 E를 늘리지 말고 그냥 노동 투입량을 줄이면 안 되는가? 더 많이 일하고 더 많은 서비스를 누리는 대신, 일을 적당히 덜 하면서 기존의 소비량을 유지하면 안 되나? 마빈 해리스는 다음과 같이 답한다.
생산성과 전문화가 상승하는 이유는 지구상의 인간들이 영토를 중심으로 조직되어 있어서 믿을 만한 상호 안전 체계를 발전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많은 사회들은 E를 늘리는 대신 상수로 유지하면서 기술환경 효용성을 늘려서 노동 투입량을 줄이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그러한 실험은 다른 모든 사회들이 동일한 방식으로 기술환경 효율성을 증가를 활용할 수 있다는 보장이 없는 한 실패할 운명이다. E를 계속 늘리는 사회는 E를 상수로 유지하는 사회보다 항상 그 세력을 확장하며, 결국 낮은 수준의 에너지 사회는 높은 수준의 에너지 사회에 흡수되기 때문이다. (p. 218)
인간의 모든 문제를 자본주의에 전가하려는 사람들이 이 말을 듣고 좋아할까봐 그랬는지 마빈 해리스는 다음과 같은 말도 덧붙였다. “사회주의 국가든 자본주의 국가든 노동 시간이 부시맨 수준으로 떨어지는 조짐은 보이지 않는다.”
내가 보기에, 이러한 설명은 왜 인간이 에너지를 많이 사용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충분한 대답인 것 같다. 그런데 이게 언제 나온 이야기인가? 1970년대 초반에 출판된 인류학 교재에 나오는 이야기이니, 이러한 논의 자체는 1960년대나 그 이전에 있었을 것이다. 당연하게도, 이런 이야기는 한국어로 된 문화인류학 교재에서도 오래전부터 나왔다. 그런 데도 인류세와 관련된 논의를 하는 사람들 중 일부는, 마치 이런 이야기는 들어보지도 못한 척을 하며 인간이 어떤 존재니 자연의 인간의 관계가 어떠니 하는 한가한 소리나 늘어놓는 것이다.
도대체 인간과 자연이 어떤 관계여야 한다는 것인가? 인간과 자연이 공존해야 한다고만 말할 뿐이다. 관계 같은 소리나 하는 강연이나 발표에서는 천혜의 자연을 담은 좋은 사진, 좋은 영상은 보여주지만, 정작 인간과 자연의 공존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전혀 설명하지 않는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관광지 소개하는 줄 알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좋은 것을 보면 당연히 공존하고 싶지 “내가 가질 수 없으니 파괴하겠어!”라고 하겠는가?
내가 페미니즘을 잘 몰라서 함부로 말하기는 어렵겠지만, 에코 페미니즘 일각에서는 자연을 여성으로 보기 때문에 파괴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한다고 한다.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대자연이 아빠인지 엄마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빠 등골을 빼먹든 엄마 등골을 빼먹든 등골을 빼먹는 놈은 불효자다. 불효자들은 손에 잡히는데로 등골을 빼먹지 아빠 등골과 엄마 등골을 구분해서 빼먹지 않는다. 인간이 대자연을 아빠로 보았든 엄마로 보았든 그게 인류세와 무슨 상관이라는 것인가?
심지어, 어떤 논문에서는 코로나19가 유행하는 와중에 갈 곳 없는 사람들이 자꾸 유채꽃밭에 몰려오니까 결국 유채꽃밭을 갈아엎었다는 신문 기사를 띡 가져와서는, 이것이 인간과 자연의 상호작용의 사례라고 주장한다. 내가 보기에 이것은 신문 스크랩에 불과한 것 같은데, 논문에서는 자꾸 무언가를 분석했다고 주장한다. 도대체 무엇을 분석했다는 것인지 모르겠다. 그런데 세상에 상호작용 안 하고 일방작용만 하는 존재자도 있나?
기후 변화의 엄중한 상황에서도, 인류세 말잔치 분위기에 편승하여 학술대회에서 말도 안 되는 소리나 하고 이를 정리하여 학술지에 논문 싣는 사람들도 있다. 이는 인류세라고 불리는 것에 인간과 자연의 관계보다도 인간과 인간의 관계가 더 주요한 영향을 미쳤음을 보여준다.
개인 차원에서 생각해보자. 기후 변화가 시급하고 중대한 문제인 것과 별개로, 학술적인 가치가 없으면 일반 잡지에 내는 것이 맞다. 인류세쟁이들은 자기들의 활동이 마치 대단한 사회참여인양 굴지 않는가? 그런데 아무런 학술적인 가치가 없는 것도 꼭 KCI 등재지에 투고한다. 아무리 망한 잡지라도 학술지보다는 많이 볼 텐데, 왜 굳이 학술지에 투고하며, 왜 등재후보지도 아니고 꼭 등재지에 투고하는가? 조직 차원에서도 생각해보자. 직장인 책 모임도 아니고 학회라고 하는 곳에서 왜 말도 안 되는 소리나 하는 사람들에게 발표 기회를 주는가? 그리고 왜 그들의 글을 학술지에 실어주기까지 하는가? 이 모든 것은 매우 간단하게 설명할 수 있다. 다른 인간이나 다른 집단과의 경쟁에서 밀리지 않기 위해 쓸 수 있는 에너지를 최대한 많이 쓰는 것이다. 자연이 그렇게 소중해죽겠어서 무가치한 것을 만드는 데 드는 종이를 아끼고 전기를 아끼는 사람들은 진작에 학계에서 도태되어 사라졌을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일부 인류세 논문들은, 논문의 내용과 무관하게, 그러한 논문들이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인류세의 본질을 드러낸다. 이를 ‘인류세 논문의 역설’이라고 부를 만하다.
* 뱀발
논문에 아무 내용도 없는데도 학술지에 실린다는 것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겠다. 다 수법이 있다. 이미 모두가 알고 있거나, 또는 누구라도 쉽게 알 수 있는 것을 모아놓기만 해놓고는 연구라고 우길 때 쓰는 수법 중 하나는 괜히 추상적이고 신비로워 보이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대칭’이나 ‘비대칭’이라고 해도, 미남미녀는 얼굴이 좌우대칭이라든지, 턱관절 비대칭 같은 걸 보면 전혀 신비로워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말을 이렇게 만들어보면 느낌이 달라진다.
“근대적 행정조직의 구성 및 운용은 인간과 자연에 대하여 대칭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 말은, 전쟁에 대비하려고 군대를 만들어서 운용하고 있었는데 근처 동네에서 산사태가 나자 장병들을 동원해서 삽질을 시켰다는 말을 쓸데없이 신비롭게 표현한 것이다. 이런 식으로 표현하자면, 다음과 같은 문장도 만들 수 있다.
“철기 시대 이후의 모든 도구의 쓰임이란, 인간과 자연에 대한 대칭적 작용을 위한 것이었다.”
이 말은, 철물점에서 사온 망치로 돌멩이를 때리니 돌멩이가 깨졌고 사람 머리를 때리니 사람 머리가 깨졌다는 뜻이다.
* 참고 문헌
Marvin Harris (1971), Culture, Man, and Nature: An Introduction to General Anthropology (Crowell; 2nd edition)
(2021.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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