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0/18

잘 모르는 학문에 대하여 아는 체 하는 방법



어떤 학문의 문제와 전공자의 문제와 학문 공동체의 문제와 애호가의 문제를 헷갈리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이는 쉽게 구분할 수 있는 문제이며, 이러한 문제를 구분하여 다루는 것이 그리 어려운 것도 아니다.

어떤 학문의 문제라고 할 만한 것은, 그 학문의 어떤 내재적이고 본질적인 부분과 관련된 문제다. 그 학문에서 공통으로 전제하는 어떤 것에 심각한 결함이 있다든지, 그 학문에서 주로 사용하는 연구방법론에 문제가 있다든지 하는 것이다.

어떤 학문 전공자의 문제와 학문 공동체의 문제에는 우연적인 요소가 많이 개입한다. 가령, 어떤 전공자가 능력이 많이 뒤떨어지는 것은 개인적인 문제이겠지만, 그런 사람들이 해당 공동체에 꾸준히 유입된다는 것은 뭔가 공동체에 여과 장치 같은 것이 없음을 보여준다. 그 학문 공동체를 유지할 만한 경제적인 상황이 나빠지면, 필요로 하는 인력보다 들어오려고 하는 인력이 줄어들고 결국 경쟁률이 일대일이 안 되는 상황이 된다. 경쟁률이 일대일도 안 되면 들어오면 안 되는 사람들이 들어오기 시작하고, 장기적으로는 그렇게 들어간 사람들을 보면서 들어와야 하는 사람들이 아예 들어올 엄두를 안 내는 상황이 된다. 그런데 이 것이 그 학문의 내재적인 요소 때문이라고 단정짓기는 쉽지 않다. 적어도, 어떤 학문 공동체에 여과 장치가 없거나 망가졌다는 것만 가지고 그 학문의 어떤 본질적인 속성에 문제가 있음이 따라나오지 않는다.

어떤 학문의 애호가들이 어떤 사람들이냐는 데는 우연적인 요소가 훨씬 더 많이 개입한다. 애호가가 그 대상을 애호하겠다는데 다른 사람이 무슨 자격으로 시비하겠는가? 대학원에는 입학시험이라도 있지 애호하는 데는 아무런 장벽도 없다. 장비 구입에 초기 투자비용이 많이 드는 취미도 아니고, 이공계처럼 기초교육을 위한 시간과 노력이 많이 드는 것도 아니고, 책 한두 권쯤 옆구리에 끼고 개소리 좀 나불거리면서 애호가인 척 할 수 있는 분야면 더더욱 그러하다. 옆구리에 낀 그 책을 번역하기 위해 전공자는 얼마나 개고생을 했겠느냐만은, 그게 그 애호가와 무슨 상관이겠는가?

이렇듯 어떤 학문과 관련하여 꼴 보기 싫은 것을 보았을 때, 그 층위를 적어도 세 가지 이상 나눌 수 있고, 또한 매우 쉽게 구분할 수 있다. 그런데 왜 이를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생기는가? 아마도 심리적인 문제일 것인데, 주로 지적 허영심과 관련될 것이다. 비록 장어 몸통은 먹지 못했으나 장어 꼬리를 먹었으니 장어 한 마리를 다 먹었다는 식으로, 해당 분야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는 거의 없지만 단편적인 지식만으로 그 분야에 대해 근본적이며 본질적인 측면을 말할 수 있다는 식으로 과시하기를 즐겨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자기가 그 학문의 본질적인 측면을 알기 때문에 세부사항을 모르는 것은 매우 사소한 흠으로 여길지도 모르겠다. 여기에는 몇 가지 유형이 있다.

우선, 특정 분야를 애호하는 사람의 결함과 그 분야의 결함이 뭔가 유관한 것처럼 엮는 것이다. 가령, 여자 신입생들하고 어떻게든 해보려고 온 힘을 다해 살아가는 복학생이 있다고 해보자. 여자 신입생만 보면 느끼한 말투로 인사를 하고는 “너, 니체 좋아하니?”라고 묻는다. 그러면 그 신입생은 니체 책만 봐도 소름이 돋을 것이다. 그런데 이게 니체가 책임져야 할 잘못인가? 니체에게 실제로 죄가 있다고 하더라도 복학생의 행동에 대한 책임까지 져야 할 이유는 없다. 내가 아는 니체 전공자는 가정생활만 잘 하는데, 왜 니체 책을 제대로 읽지도 않았을 놈의 개수작까지 니체가 책임져야 하겠는가?

이걸 애호가가 아니라 학문 공동체 수준에서 이야기할 수도 있다. 가령, 어떤 분야에서는 유독 이상한 논문이 많이 나올 수도 있다. 이것은 그 분야의 결함과 유관한가? 두 가지 경우를 생각할 수 있다.

하나는 그 학문의 본질적인 것과 무관한 요소 때문에 그렇게 될 경우이다. 가령, 어떤 학교에서 나오는 동양철학 논문이 유독 이상하다고 해보자. 이것이 그 학교의 문제인가, 동양철학의 문제인가? 다른 학교나 다른 나라에서 나오는 동양철학 논문을 보면 된다. 유가의 자기 수양을 주제로 석사논문을 쓰면서 한국어로 몇 년 전에 출판된 책조차 찾아보지 않고 논문에다 수필을 써놓은 사례를 가지고 동양철학 일반의 문제라고 분개하면 안 된다. 왜냐하면 다른 학교에서는 같은 주제로 멀쩡하게 석사학위 논문을 쓰기 때문이다. 이는 동양철학의 문제가 아니라 특정 학교의 문제일 뿐이며, 그 논문을 가지고 동양철학의 문제라고 분개한 사람은, 설사 ‘학계’ 같은 말을 입에 달고 산다고 해도, 학계에 대해 거의 아는 바가 없음을 알 수 있다.

다른 하나는 그 학문의 본질적인 요소 때문에 벌어지는 것 같은 경우이다. 예를 들어, 질적 연구는 어떻게 해도 양적 연구보다 논문 생산량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이는 통계를 프로그램에 때려넣어서 뽑아내는 상관관계 같은 것을 인간이 두뇌로 뽑아내야 하기 때문에 그렇다. 그리고 최고 수준의 논문에서는 어떤지 모르겠는데, 적어도 중간 이하 수준에서는 양적 연구가 질적 연구보다 질적으로도 낫다. 양적 연구에서는 프로그램을 쓰니까 맞든 틀리든 어쨌든 뭐가 나오기는 나오는데, 질적 연구에서는 뇌를 쓰는 데 적합하지 않은 연구자가 잡담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는 것 말고는 논문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이 없는 경우가 생긴다. 그런데 이는 대학원 가면 안 되는 사람이 가서 벌어진 일일 뿐이며 질적 연구 자체를 폄하할 근거가 될 수는 없다. 앞서 말했듯이, 중간 이하에서나 나타나는 현상일 뿐 최고 수준의 논문에서는 나타나지 않는 현상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특정인이나 특정 공동체의 결함을 보고 특정 학문에 결함이 있다고 판단하기는 결코 쉽지 않다. 반대로 말하자면, 누군가가 그러한 소수 사례만 놓고 특정 학문의 결함을 선언할 정도라면, 그 사람은 아는 것도 없으면서 아는 체 하고 싶어 죽겠는 사람이라고 생각해도 큰 무리는 없다는 것이다.

특정 사례를 언급하며 해당 학문의 결함을 언급하면 너무 없어 보인다는 것을 알지만, 그러면서도 아는 체 하고 싶어 죽겠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 사람들은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 같은 것이 있다는 것도 알기 때문에 특정 사례를 함부로 언급하는 것도 자제한다. 그런데 여전히 아는 체 하고 싶어서 죽을 것 같다.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매우 거대한 이야기를 한다. 거대한 이야기로 선수 치면, 설령 상대방이 맞는 이야기를 하려고 해도 거대한 이야기의 수렁에 빠져 허우적거리게 되고, 안목없는 청중들의 눈에는 한 방 맞은 것처럼 보이게 된다.

가령, 누군가가 조심스럽게 철학 이야기를 꺼내며 겸손한 척 자신의 유식함을 뽐내려 한다고 해보자. 유감스럽게도 아는 척 하고 싶어 죽겠는 사람은 철학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 이 때 상대방이 분석철학 이야기를 한다면, 아는 척 하고 싶어하는 사람은 아마도 이렇게 말할 것이다. “흥! 그래봤자 분석철학은 분석이나 하는 철학이지!”

“흥! 그래봤자 분석철학은 분석이나 하는 철학이지!”라고 하는 말은, 분석철학에 형이상학도 없고 윤리학도 없고 미학도 없고 그래서 매우 빈약한 분야라는 것을 비판하는 일종의 관용구이다. 그런데 이는 1950년대에나 나왔던 이야기이며 그 이후의 분석철학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그래서 누군가가 이런 식으로 자신의 유식함을 뽐내려고 한다면 그 사람이 1950년대 이후로 업데이트가 안 되었다고 보면 된다. 이는 누군가가 방탄소년단 팬이라서 한국에 대해 어느 정도 알게 되었다는 사람 앞에서 “흥! 그래봤자 한국은 한국전쟁 때 잿더미가 된 나라지!”라고 말하는 것과 비슷하다.

논리실증주의에서는 윤리학, 형이상학, 미학을 다 날려버리려고 했지만 실패하고 결국 오늘날 분석철학자들은 윤리학 논문, 형이상학 논문, 미학 논문을 쓰고 있다. 대륙철학 전공자들도 분석철학 대학원 수업에 많이 들어오기 때문에 정상적으로 배운 사람이라면 그런 식으로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한국어로 번역된 책 중에는 한스요한 글로크가 지은 『분석철학이란 무엇인가』(What Is Analytic Philosophy?)도 있는데, 분석철학이 분석이나 하는 철학이었다면 굳이 그런 책이 세상에 나올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든지 말든지, 아는 체 하고 싶어 죽겠는 사람에게 그러한 것들이 알 바이겠는가?

위에서 언급한 것들을 참고한다면, 잘 모르는 어떤 분야에 대해 아는 체를 하면서도 멋모르고 까분다는 인상을 주지 않으려면 어떻게 할지에 대한 지침도 얻을 수 있다. 앞서 이야기한 것과 반대로만 하면 된다. 최대한 세부적인 내용을 언급하면서 다루는 범위를 한정하고 해당 분야의 다른 모범 사례를 언급하면서 해당 분야에 대한 존중을 표한다면, 설사 해당 분야에 대한 비판이 약간 틀리더라도 전공자 눈에 그리 나쁘게 보이지는 않을 것이어서 나름대로 호의적인 반응을 얻을 수도 있다. 이렇게 된다면 문외한들 눈에는 아는 체 하는 사람이 전공자에게도 좋은 이야기를 듣는 것으로 보여서 더 효과적으로 아는 체 할 수 있다.

다음과 같은 가상의 사례를 생각해볼 수 있겠다.

나쁜 사례)

“역사학이라는 것은 어차피 우표 수집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이렇게 말하면 전방위적인 비난을 받게 될 것이다. 일단 “네가 역사학에 대해 뭘 아느냐?”는 인신공격이 들어왔을 때 정말로 아는 것이 없어서 방어하지 못할 수도 있다. 점잖은 사람들이 역사학에서의 연구 사례를 구체적으로 들면 더 부끄러워진다.

괜찮은 사례)

“내가 캐시 기어의 2011년 논문을 제대로는 못 읽고 대충 훑어봤어. 3분의 2까지는 뇌 의학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통 속의 뇌 같은 사고 실험을 이야기하면서 철학에 미친 영향 같은 이야기를 하는 거야. 그런데 무슨 영향을 주었다는지 알 수가 없어. A가 B에 영향을 주었다는 것과 A가 있고 B가 있다는 것은 분명히 다른 건데 이걸 구분하지 못하는 건지, 심증만 있고 물증이 없어서 뭉갠 건지를 모르겠어. 역사 전공자들 중에 철학 같은 이야기를 하고 싶어 죽겠는 사람들이 간혹 있나 봐. 훌륭한 선생님들은 절대로 안 그러시던데.”

여기서 핵심은 세 가지다.

(1) 특정 인물과 특정 논문 언급

(2) 비교적 명확한 비판 지점 설정

(3) 모범 사례 제시를 통한 해당 분야 존중 표현

이런 식으로 구체적인 사례를 언급하면 정말 아는 것이 이것밖에 없더라도 뭔가 더 많이 아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해당 분야에 대하여 아는 것이 거의 없고 단지 특정 논문에서 사소한 꼬투리를 잡은 것에 불과한데도, 특정한 논문을 언급했다는 것만으로도 마치 뇌 의학에 대해서도 뭔가 아는데 말하지 않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는 것이다.

아는 체 하는 입장에서 약간 어설프게 말하더라도 일단 “네가 역사학에 대해 뭘 아느냐?”는 비난은 받지 않게 되고, 틀린 내용이 있어도 아는 사람들이 교정해주거나 뒷이야기를 해주기도 한다. 뒷이야기라는 것은 “그 선생님이 쓰고 싶지 않은 논문인데 억지로 썼다”든가 “원래 그런 분은 아닌데 연구비 때문에 그랬다”든가 “그 분이 논지를 잘 펴다가 논문 끝나기 전에 갑자기 비분강개하는 습관이 있다”든가 하는 식이다. 그리고 한 분야의 전공자라고 해도 모두가 한 마음 한 뜻이 아니기 때문에 전공자가 비판 지점을 더 명확하게 짚어줄 수도 있다. “그렇지? 여기서 철학 이야기가 왜 나와?”라고 하면서.

(2021.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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