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한국 드라마에서는 주인공들이 직업과 상관없이 결국은 연애를 할까? “한국 사람들이 연애에 환장해서”라고 하기에는 석연치 않은 점이 많다. 그건 “한국 맥주는 왜 싱거운가?”라는 질문에 “한국 사람들이 싱거운 맥주를 좋아해서”라고 답하는 것과 같다. 한국 사람이 싱거운 맥주를 좋아해서 한국 기업이 싱거운 맥주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 기업들이 싱거운 맥주만 만드니까 한국 사람들이 맥주는 원래 그런 건가보다 하고 그냥 먹는 것이다. 드라마도 마찬가지다. 왜 한국 방송국은 연애 이야기나 하는 드라마를 주로 만들까?
연애 이야기를 풀어내는 데는 딱히 연구할 필요도 없고 고증할 필요도 없다. 그저 자기가 한 연애, 주워들은 다른 사람의 연애, 통속적으로 떠도는 이야기를 몇 개 엮으면 새것처럼 보이는 진부하고 뻔한 이야기가 뚝딱 나온다. 그렇게 대충 만들어도 주인공만 미남 미녀면 사람들이 좋다고 반응해주니, <인터스텔라>를 만든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처럼 4년 동안 물리학 공부를 할 필요가 없다. 다들 그런 식으로 이야기를 지어내는 판에 굳이 남들 안 하는 짓을 하면서 시간을 더 들일 필요가 없다. 그 시간에 시나리오 한 편 더 찍어내서 돈을 버는 게 나을 것이다.
“한국영화는 왜 ‘핵노잼’ 미운털이 박혔나”라는 기사는, 아마도 기자가 의도한 바는 아니었겠지만, 한국 영화의 문제점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불과 1년 전, ‘명량’과 ‘국제시장’이 중장년층을 끌어들이며 쌍끌이 1천만 시대를 열었지만, 그 사이 20~30대 취향이 크게 변한 것을 놓쳤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 취향은 흥행을 예상하지 못했던 외화의 선전으로 나타났다. [...]
[...] 주목해야 할 것은 ‘이슈’다. 이슈메이커 역할은 그야말로 외화의 몫으로 완벽하게 넘어갔다. ‘킹스맨’은 5포세대로 분류되는 20대들의 좌절을 건드렸고, ‘어벤져스2’는 초보자는 이름도 외우기 힘든 마블 세계관을 굳건하게 뿌리내렸다. [...]
이 과정에서 ‘캐릭터’에 집중하는 팬덤 현상도 나타났다. [...] 최근 한국 영화 속 캐릭터가 영화를 빠져나와 별도의 이슈를 만들어내는 아이콘이 된 사례가 거의 없었다는 점은, 한국 영화 속 캐릭터 구축이 동시대 관객들의 니즈와 동떨어졌다는 걸 반증할만하다.
[...] 더구나 느렸다. 기획부터 개봉까지 기간이 꽤 길어서, ‘쎄시봉’은 MBC ‘놀러와’가 열풍을 만들어낸 2011년 이후 4년이나 지나 극장에 걸렸다. 그 사이 대중은 향수를 자극하는 노래들로 벌써 90년대 음악을 소비해버렸다. ‘쎄시봉’은 흘러가도 너무 흘러간 코드였다. ‘오늘의 연애’가 마케팅 주요포인트로 삼은 ‘썸’은 벌써 1년전 소유X정기고가 부른 ‘썸’으로 피크를 맞았던 것이었다. 영화라는 게 원래 오래 걸리는 작업이라고 포기하지 않고, 기획부터 개봉까지 기간을 최대한 줄이려는 노력이 필요한 부분이다.
해당 기사는 한국 영화가 재미없는 이유로 ‘이슈’를 만들어내지 못한다는 점을 지적한다. 영화 <쎄씨봉>과 <오늘의 연애>를 예로 들며 “기획부터 개봉까지 기간을 최대한 줄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하는데, 이 말은 어차피 한 번 보고 잊혀질 영화니까 대충 빨리 만들어서 관객들 돈이나 빨아먹으라는 소리다. 이게 말이냐?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자. 영화를 기획하고 제작하는 데는 일정한 시간이 들어간다. 영화를 만드는 사이에 유행은 지난다. 어떤 유행이 시작된 것을 보고 유행이 끝나기 전까지 부랴부랴 영화를 제작한다고 했을 때 과연 일정 수준 이상의 영화가 나올까? 그딴 식으로 만든 영화가 정상적일 리는 없다. 물론, 영화를 보는 안목이 발바닥에 붙어있는 사람들은 아무 영화나 보고 즐거워하여 돈과 시간을 버릴 테지만, 애초부터 관객을 돈이나 흘리는 호구로 보고 얄팍하고 안이하게 영화를 만드는데 웬만큼 괜찮은 영화가 나올 수 있을까?
해당 기사에서는 마치 영화 외적인 요소 때문에 관객들이 한국 영화를 외면한 것처럼 말한다. 영화사와 척지게 될까봐 기자가 일부러 영화의 결함을 언급하지 않았는지는 모르겠으나, 그게 아니라면 기자의 안목은 그야말로 똥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기사에서 언급한 영화를 포함하여 최근에 내가 본 영화 중 몇 편은 영화 자체에 문제점이 있었다.
<쎄씨봉>에서 송창식, 윤형주, 조영남은 가상 인물의 연애를 위한 들러리에 불과하다. 서로 사랑하는 남녀 주인공이 있었는데, 여자 주인공을 돈 많고 힘 있는 다른 남자한테 빼앗겼지만 남자 주인공은 여자 주인공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더라, 하는 그런 진부한 이야기에 최근 유행하던 쎄씨봉을 뿌려놓은 것이다. <건축학 개론>에서 이재훈과 수지를 정우와 한효주로 바꾸고 1990년대를 1970년대로 바꾸면 비슷한 이야기가 된다. 송창식, 윤형주, 조영남, 김세환을 생각하며 영화관을 찾았을 중년 관객들은 극장문을 나가며 ‘아, 낚였네’ 하고 생각했을 것이다.
<순수의 시대>는 정사 장면 빼고는 쓸 게 없는 영화다. 태조 이성계의 신임을 받던 장군(신하균)에게 망나니 아들이 있었고, 그 아들에게 원한을 품은 여자가 그 아들의 집안을 뭉개버리기 위해 신하균을 유혹했고, 이 때문에 그 집안이 완전히 망했지만 결국은 신하균과 그 여자는 서로 진심으로 사랑하더라, 라고 하는 영화다. 왜 왕자의 난을 배경으로 했는지 모르겠다. 그냥 21세기를 배경으로 한 주말드라마였으면 차라리 나았을 것이다.
<오늘의 연애>는 주인공의 얼굴이나 뜯어먹는 영화다.
<차이나타운>은 한국 영화 몇 개를 대충 섞어 놓은 것이다. 보스의 명령을 개처럼 따르던 부하가 이성에 한눈을 팔아 보스의 명령을 딱 한 번 거스르자 보스는 그 부하를 죽이려고 했고 그런데도 부하는 극적으로 죽지 않고 살아남아 보스를 죽인다.(<달콤한 인생>) 그 조직은 중국인으로 구성되어 있고 중국에서 한국에서 넘어오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며(<황해>), 아이를 납치해 돈벌이에 이용하고 장기매매를 한다(<아저씨>). 그리고 그 조직원들은 전부 가족관계다(<화이>). 이렇게 영화 몇 개를 섞으니 민망했던지 주인공은 여자다. 이렇게 해놓은 것을, 영화소개 프로그램에서는 여성이 주인공인, 보기 드문 느와르 영화라고 소개한다. 놀고 자빠졌다. 보기 드물기는 뭐가 보기 드문가? 여러 영화를 마구 섞을 때 나타나는 문제는 몇 가지 영화를 섞으면서 각 영화에 있었던 개연성이 죄다 사라진다는 것인데 <차이나타운>도 예외는 아니었다. 등장인물이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영화 <닥터> 또한 <순수의 시대>처럼 정사 장면 외에는 쓸 게 없는 영화다. 김창완은 <닥터>의 시나리오를 받고는 너무 터무니없는 내용의 영화라 출연하지 않으려고 했다가 그런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이 어떤 심리로 그런 영화를 만드는지 궁금해서 출연을 결심했다고 말했다. 그렇게 김창완은 연기 인생에 오점을 찍는다.
얼마나 <닥터>라는 영화가 어처구니없는 영화였던지, 인터뷰에서도 이 영화가 언급된다. 인터뷰에서 김창완은 <닥터>를 통해 “상업주의가 무엇인지 배웠다”고 했다. 상업주의가 무엇이냐는 물음에 김창완은 “그냥 돈을 벌려고 하는 게 아니라 (관객으로부터) 돈을 뺏어 오려고 하는 것”이라고 답한다. 아마도 (영화가 제대로 되든 말든) 기획부터 개봉까지 걸리는 시간을 줄이고 이슈로 사람들의 이목을 끌고 캐릭터로 팬덤 현상을 일으켜서 얄팍하게 돈을 벌려고 하는 것을 가리킬 것이다.
나는 작가주의가 뭔지, 예술이 뭔지는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상도덕’은 지켜야 하는 것 아닌가? 고객이 8천 원을 내면 8천 원 어치 이상의 만족감을 느낄 상품을 제공해야 한다. 어차피 손님들이 맛을 잘 모른다면서 싼 재료에 조미료 퍼넣어서 대충 팔아먹는 음식점은 망해야 하고 망할 수밖에 없다.
* 링크(1): [OSEN] 한국영화는 왜 ‘핵노잼’ 미운털이 박혔나
( http://osen.mt.co.kr/article/G1110171068 )
* 링크(2): [서울신문] 김창완 “‘닥터’ 출연은 완전 실수…돈 뺏으려고 만든 거더라” 혹평
( 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50218500081 )
* 링크(3): [Newsen] “‘인터스텔라’ 놀란 감독, 과학 탓에 창의력 방해받을까 걱정했지만..”
( www.newsen.com/news_view.php?uid=201504301205509610 )
(2015.0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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