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4/25

나는 왜 페미니스트가 아닌가

작년 말에 우연히 사회운동단체 활동가와 술자리를 같이 한 적이 있었다. 나보다 나이가 열 살 정도 많은 분이었다. 그 분이 나에게 여러 가지 사안에 대한 견해를 물어서 나는 평소 생각대로 말했는데, 그 분은 내가 대답을 할 때마다 강한 영남 억양으로 “캬, 정확하네!”라고 하셨다. 마치 영화 <범죄와의 전쟁>에 나오는 “살아있네!”와 같은 억양이었다. 그렇게 그 자리에서 그 분에게 “정확하네!”라는 말을 스무 번쯤 들은 것 같다.

그 분은 내가 마음에 들었는지 “◯◯◯씨는 본인이 맑시스트라고 생각합니까?”라고 물었다. 그 분은 내가 내 입으로 스스로 맑시스트임을 인정했으면 하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아니요”라고 답했다. 그러자 그 분은 의외라는 표정을 지으며 왜 그렇게 생각하냐고 물었다.

나는 “-주의자”나 “-ist”라고 불리는 사람은 어떤 이념을 웬만큼은 제대로 알고 그에 상응하는 실천을 하는 사람이라고 알고 있다. 가령, 기회주의자는 기회주의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 아니라 기회주의적으로 사는 사람이다. 책 몇 권 읽었다고 ◯◯주의자가 저절로 되는 게 아니다. 나는 마르크스주의도 잘 모를 뿐 아니라 실천은커녕 그냥 대학원에서 찌질이로 활동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다.

그 분은 나보고 “그래도 맑스주의에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으냐”고 물었고 나는 “관심이 있고 나중에 여력이 되면 관련 문헌을 찾아보겠지만, 아직은 맑시스트라고 할 수는 없다”고 했다. 여러 번 실랑이를 했다. 그 분은 어떻게든 내가 맑시스트라고 실토했으면 했고 나는 끝까지 맑시스트가 아직 아니라고 했다. 그분은 뭔가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다.

페이스북을 보니, 여성 차별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나는페미니스트입니다”라고 헤시태그를 달아놓는 모양이다. 나는 이걸 매우 좋게 보지만 막상 내가 하려니 남사스럽다. 나는 페미니즘에 대해서도 잘 모르며 실천은커녕 여전히 대학원에서 찌질이로 살고 있기 때문이다.

나에게 적합한 문구는 “나는 페미니스트입니다”는 아니고 “나는 나는 무럭무럭 자라서 페미니스트가 될 겁니다” 정도인 것 같다. 언젠가 “#‎나는페미니스트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날이 올 거라 믿고 있다.

(2015.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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