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1/19

신학대 학생회의 선본명



요새 대학에서 학생회 선거를 하나 보다. 버스정류장에서 내려서 강의실로 걸어가는 데 학생들이 길거리에서 선거운동을 한다. 어떤 선본의 선본곡은 싸이의 <챔피언>이다. 2024년 기준으로 옛날 노래인데 학생들이 그 음악에 맞추어서 율동한다. 율동 연습은 많이 안 한 것 같다. 보고 있으니 괜히 웃음이 난다. ‘하여간 저 학생들은 젊어서 좋겠다. 나도 저 노래가 나올 때는 젊었는데’ 하면서 지나가는데 다른 곳에서 다른 선본이 구호 같은 것을 큰 소리로 외친다. 그런데 약간 이상하다. 선본 이름이 <바로>란다. 바로? 이 학교는 신학대인데, 선본 이름이 <바로>라고?

웃음을 참고 강의실로 들어갔다. 요새는 수업 전에 수업과 아무 상관 없는 이야기를 한다. 어차피 수업 때 모두가 고통받기 때문에 요새는 수업 전에 수업과 아무 상관 없는 이야기를 한다. 내가 “선본 이름이 <바로>래요. 여기 신학대인데 그래도 돼요?”라고 물었는데 학생들이 아무런 동요가 없다. 뭐지? 왜 아무도 안 웃지? 한 학생이 답한다. “신학 전공 학생들 선본 이름이에요.” 심지어 신학 전공 학생회 선본이란다. 이게 된다고? 그런데 아무도 웃지 않는다. 나는 뭔가 잘못되었음을 직감하고 곧바로 수업을 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다. 왜 아무도 이걸 듣고 안 웃지? 다들 선본 이름 가지고 신나게 웃었는데 나 혼자 뒷북 치는 건가? <언어철학> 수업 끝나고 쉬는 시간에 과학철학 대학원생 단체 카톡방에 강의실 복도에서 찍은 학생회 선거 포스터 사진을 올렸다. 사진을 올린 뒤 “여기 신학대인데 선본 이름이 좀...”이라고 글을 썼다. 여기서도 아무도 반응하지 않았다. 대학원생 중에 신학박사인 목사님이 있는데도 그랬다. 왜 그럴까? 10분 정도 있다가 답장이 왔다. 목사님도 이게 왜 문제인가 하고 한참 보다가 뒤늦게 뭔지 알았다고 했다. 학생들은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고, 학교 측에서도 의식하지 않은 것 같다면서, 아마 해당 신학교가 진보적인 교단이어서 다소 허용적이었을 것이고 아마 ㅊㅅ대나 ㄱㅅ대 같은 보수적인 교단이었으면 여러 사람 끌려갔을 수 있다는 농담을 덧붙었다.

<심리철학> 수업 때, 나는 다시 선본 이름을 꺼냈다. 실패할 수 없는 개그인데 이렇게 묻히는 것이 너무 아까웠다. 쉬는 시간에 과학철학 대학원생 단체 카톡방에 올렸던 사진과 그에 대한 목사님의 답장을 언급했다. 여전히 학생들은 이게 뭐가 문제인가 하는 표현으로 눈만 꿈벅꿈뻑 했다. 학생들의 표정이 너무 평온해서 약간 당황스러웠다. 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구약에 <출애굽기> 있잖아요? 안 읽어봤어요?” 한 학생이 자기는 구약은 잘 안 읽어봐서 모른다고 했다. 학생들이 알고 웃지 않는 것이 아니라 몰라서 못 웃는다는 것을 그 때 알았다. 그래서 나는 몇 마디 덧붙였다.

“애굽이 이집트잖아요? 이집트를 한자로 음차해서 애굽인 거고, 그래서 <출애굽기>는 <이집트 탈출기>라는 뜻이잖아요. 개역개정판 성서에 ‘바로’라고 나오는 게 뭐냐 하면 ‘파라오’를 한문으로 음차한 거예요. 그러니까 여기가 신학대인데 선본 이름은 <바로>이고, 그 <바로> 선본이 학생들의 목소리를 듣고 약속을 지키겠다는데, 바로가 약속을 바로 안 지킬 것 같잖아요? 열 가지 정도 재앙을 겪어야 약속을 지킬 것 같지 않아요?”

그제야 학생들이 웃기 시작했다. 신학대 다닌다고 해서 다 개신교 신자는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나의 이종사촌 동생도 이 학교를 졸업했지만 지금도 교회는 다니지 않는다), 바로가 파라오의 음차라는 것을 학생들이 모를 줄은 몰랐다. 그렇게 학생들이 한참 웃을 때 목사님의 두 번째 가설(진보적인 교단이라서 허용적인 분위기가 있었을 것이다)을 말했다. 그러자 졸던 학생들도 깨서 웃었다.

(2024.11.19.)


2025/01/18

20센티 정도 되는 돼지감자



몇 년 전 돼지감자가 당뇨에 좋다는 소식을 듣고 어머니가 돼지감자를 몇 개 얻어왔는데, 안 먹고 며칠 두었더니 썩어버려서 다른 음식물쓰레기를 버릴 때 밭 가장자리에 같이 버렸다. 그러고는 몇 년이 안 되어 비탈면을 따라 돼지감자가 퍼져버렸다.

도랑의 비탈면에서 흙을 파내다 돼지감자를 몇 개 캐게 되었다. 내가 아는 돼지감자는 잘해봐야 엄지손가락 정도 크기인데 오늘 캔 것은 길이만 20센티 가까이 될 정도로 크다. 웬만한 감자보다 큰 것 같다.

(2024.11.18.)


2025/01/16

글쓰기 수업에서 도망간 학부생 튜터



내가 조교 일을 하는 글쓰기 수업에는 대학원생 조교 한 명과 학부생 튜터 한 명이 배정된다. 그 튜터가 지금까지 해야 할 일을 하나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수업에 나오라고 할 때는 아프다고 안 나오고, 학생 게시물에 댓글을 달라고 해도 댓글 안 달고, 기한 내 면담하라고 하니 기한이 한참 지난 후 면담을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물었다. 튜터를 잡아족칠 수도 없고 족친다고 해서 달라질 상황도 아니어서 해당 수업을 맡은 대학원 선배는 튜터한테 더 이상 연락하지 않기로 했다. 그 대신 업무를 약간 조정해서 내가 아홉 명을 추가로 면담하기로 했다. 선배는 학교에서 강의하면서 이런 일은 처음 겪는다며 강의할 맛이 안 난다고 했다.

학부생 튜터가 배 째라는 식으로 나오면 강사가 할 수 있는 것은 마땅히 없다. 선배는 교수도 아니고, 그 학부생하고는 아예 단과대부터 달라서 누구한테 대신 혼내달라고 할 수도 없다. 기초교육원에 가서 튜터를 자를 수 없냐고 물었더니, 기초교육원에서도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 관련 규정이 없다고 했다고 한다. 선배만 이런 일을 처음 당한 게 아니라 기초교육원도 처음 당했던 것이다. 튜터를 자르는 규정이 없어서 해당 튜터는 아무 일도 안 하고도 튜터비를 받아 가게 생겼다.

대학원생 조교 복무협약서를 보면, 조교에게 얼마를 언제까지 입금한다는 내용(제3조)과 조교에게 부당하게 일을 시켰을 때 조교가 관계 부서에 직권 조사 등을 요청할 수 있다는 내용(제6조)는 있으나 조교가 부당하게 일을 안 했을 때 돈을 못 받게 한다든지 받은 돈을 토해내게 하는 내용은 없다. 조교 업무를 중단하게 하거나(제7조) 조교 자격을 박탈하는 것(제8조)까지는 있으나 이 경우에도 돈을 안 준다는 내용은 없다. 일단 조교가 되면 일을 하든 안 하든 돈은 받게 된다. 학부생 튜터 복무협약서도 조교 복무협약서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복무협약서에 명시된 규정은 왜 이리 허술한가? 허술하게 해도 그 동안 아무 문제도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반대로 말하자면, 규정이 촘촘하다는 것은 그만큼 관련 사고도 많았다는 것이기도 하다. 미국 같은 나라에 별의별 규정이 많다고 하는데 관료들이 할 일이 없어서 취미 삼아 그러한 규정을 만들었겠는가? 넓은 땅에서 수많은 미친 놈들이 다종다양한 사고를 쳤으니 그렇게 되었을 것이다. 기초교육원도 이번에 학부생에게 쓴맛을 보았으니 다음 학기에는 복무협약서 규정을 개정할 수도 있겠다.

* 뱀발

나는 이런 사례를 게임이론 교과서에서도 보지 못했던 것 같다. 별의별 경우를 다 만들어 내는 경제학자들이 학부생이 교수에게 배신 전략을 쓸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까? 그럴 리는 없다. 자기한테 게임이론을 배운 학생들이 자기한테 배신 전략을 쓴다고 생각하니 끔찍해서 혹시라도 학생이 교과서에 나온 사례를 보고 모방할까봐 아예 언급조차 하지 않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2024.11.16.)


2025/01/14

문자의 시각적인 정보 처리



나는 어떤 것을 글로 쓸 때 문자의 시각적인 정보 처리도 고려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대부분의 경우 글을 소리내어 읽지 않고 눈으로만 읽는다. 내가 글을 쓰는 것은 내가 표현하고자 하는 바를 쉽고 정확하고 빠르게 전달하기 위해서다. 눈으로 글을 읽을 때 방금 읽은 것이 무슨 내용인지 확인하려고 다시 읽지 않도록 신경 써야 한다. 방금 읽은 단어가 무슨 단어인지 헷갈려면 읽는 속도가 떨어지고 내용을 파악하는 데 드는 에너지가 늘어난다.

한글 맞춤법 규정을 고려하면 사이시옷을 왜 써야 하는지는 대강 알겠는데, 어떤 경우는 굳이 맞춤법 규정을 지켜야 하나 싶을 정도로 보기에 썩 좋지 않은 경우도 있다.

(1) 최솟값

(2) 최소값

중 맞춤법에 맞는 것은 (1)인데, 볼 때마다 괜히 마음이 불편해진다. ‘최소값’으로 쓰면 ‘최소+값’인 것이 쉽게 보이는데 ‘최솟값’으로 이게 뻔히 ‘최소+값’인 것을 알면서도 ‘최소+ㅅ+값’으로 눈에 보여 자꾸 신경 쓰인다. ‘최’와 ‘값’ 사이에 낀 ‘솟’이 볼 때마다 눈에 거슬린다.

구어에 가깝게 쓰느라 축약된 표현을 쓰는 것도 시각적 정보처리 속도를 늦춘다. ‘-인데’를 실제 말하는 대로 ‘-ㄴ데’로 줄여 쓰는 경우가 많은데, 이렇게 쓰면 글을 읽을 때 내용 파악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늘어난다. 말할 때는 ‘-ㄴ데’라고 하더라도 글로 쓸 때는 ‘-인데’라고 풀어쓰는 것이 더 낫다.

(3) “나 김문순데.”

(4) “나 김문수인데.”

(3)의 경우, 방금 읽은 것이 ‘순대’인지 ‘순데’인지 구분하기 위해 다시 읽거나 읽는 속도를 늦추어야 한다.

(5) “나 도지산데.”

(6) “나 도지사인데.”

(5)의 경우도 화자가 도지(코인)를 살 것이라고 말하는 것인지 화자 자신이 어떤 광역자치단체장이라고 밝히는 것인지 확인하기 위해서 해당 부분을 다시 읽거나 읽는 속도를 늦추어야 한다.

(7) “형수님, 저 흥분데요.”

(8) “형수님, 저 흥부인데요.”

(7)의 경우, 흥부가 흥분했을 경우 “흥분돼요”라고 말했을 것이기 때문에 ‘흥분데요’를 보아도 흥부가 흥분되지 않았음을 충분히 알 수 있으나, 방금 읽은 것이 ‘흥분데요’인지 ‘흥분돼요’인지 구분하기 위해 해당 부분을 다시 읽거나 읽는 속도를 늦추어야 한다.

(2024.11.14.)


내가 철학 수업을 올바른 방향으로 하고 있다는 증거

대학원 다니면서 들은 학부 수업에서 몇몇 선생님들은 수업 중간에 농담으로 반-직관적인 언어유희를 하곤 했다. 나는 이번 학기에 학부 <언어철학> 수업을 하면서 그런 식의 농담을 하나도 하지 않았다. 나부터 그런 반-직관적인 언어유희에 재미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