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2/21

내가 철학 수업을 올바른 방향으로 하고 있다는 증거



대학원 다니면서 들은 학부 수업에서 몇몇 선생님들은 수업 중간에 농담으로 반-직관적인 언어유희를 하곤 했다. 나는 이번 학기에 학부 <언어철학> 수업을 하면서 그런 식의 농담을 하나도 하지 않았다. 나부터 그런 반-직관적인 언어유희에 재미를 느끼지 않기 때문에 학생들에게 굳이 그런 농담을 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아예 언어철학과 무관한 농담을 했다.

그래도 학생들은 내가 하는 농담을 좋아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럴 수밖에 없다. 앞 시간에 페리를 하고 그 다음 시간에 에반스를 하는데 그 중간에 하는 우스갯소리가 재미가 없을 수가 있겠는가? 앞 시간에 타르스키를 하고 그 다음 시간에 데이비슨을 하는데 내가 하는 농담이 웃기지 않을 수가 있나?

언제는 학생들도 지치고 나도 지치고, 솔직히 나도 재미없는 내용인데 교재에 있어서 안 가르칠 수는 없는 내용을 가르친 적도 있었다. 학생들이 다들 반쯤 정신이 나가 있었고 앞자리에 앉은 학생들도 눈이 풀려 있었다. 물론, 나는 학생들의 그러한 모습에 화가 나거나 좌절하지 않았다. 그게 정상적인 사람들의 정상적인 반응이기 때문이다. 알아듣기 힘들고 어려워 죽겠는 내용을 듣고 재미있다면서 들뜨는 게 오히려 비-정상이다. 어쨌든 나는 학생들에게 설명을 제대로 못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무엇을 했느냐? 강신주 욕을 했다.

강신주가 한동안 안 보이다 얼굴이 수척해지다 못해 얼굴형이 바뀐 것을 보고 강신주 욕을 하지 않기로 했었다. 죽을병을 앓았던 모양이라 굳이 욕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유튜브에 강신주 최신 영상이 올라와서 보니 예전에 했던 대로 또 갱년기 아저씨와 아주머니들의 심리적인 취약점을 살살 긁으며 손쉽게 돈을 긁어모으고 있었다. 나는 6학점 강의해 봐야 100만 원 약간 남짓 받는데, 강신주는 똥 같은 소리나 하면서 쉽게 돈은 버니 약간 화가 났다.

나는 학생들에게 강신주 박사를 아는 사람이 있냐고 물었다. 다들 모른다고 했다. 그래서 강신주가 어떤 사람인지, 무엇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어떤 식으로 약을 파는지 말했다. 그런 다음, 어떤 주제든 어떤 철학이든, 죄다 연애 아니면 사랑으로 연결 짓는다고, 이런 양아치가 어디에 있냐고 학생들에게 말했다. 내 말에 죽어가던 학생들에게 생기가 돌아왔다. 풀렸던 눈동자에도 다시 초점이 돌아왔다. 학생들이 다시 살아났으니 다시 언어철학 강의를 하려던 참에 청강생으로 강의실에 들어와 있던 한 학생이 나에게 이렇게 물었다.

“그래도 언어철학으로 연애 이야기를 푸는 것은 어렵지 않을까요?”

그 말에 나는 강신주는 언어철학으로 어떤 양아치 짓을 하는지 설명할 수밖에 없었다.

강신주에 따르면, 어떤 사람을 아낀다는 것을 그 사람만의 고유한 특성을 가진 유일한 존재로 보는 것이고, 어떤 사람을 다른 사람들이 가지는 속성으로 묶어서 생각하는 것은 그 사람을 수많은 사람 중 하나로 보는 것이며 일종의 부품처럼 보는 것이다. 이것부터 뭔가 이상한데 강신주는 여기에 러셀의 한정기술구 이론과 크립키의 인과적 지시 이론을 뿌린다. 누군가를 한정기술구로 지칭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가진 조건들로 그 사람을 지칭한다는 것이다. 반면, 최초의 명명식과 인과 사슬을 통해 누군가를 지시한다는 것은 그 사람을 유일한 존재, 어떠한 단독자로 대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정치적으로는 러셀이 진보적이고 크립키는 아닌 것 같지만, 철학적으로는 러셀이 보수적이고 크립키가 진보적이라는 것이 강신주의 주장이다.

이 말을 듣자, 학생들이 혼란에 빠진 것처럼 보였다. 앞에 앉은 몇몇 학생들은 나의 설명을 듣고 역하다는 듯한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해당 강연은 김어준의 <벙커1>에서 했던 것이고 교재는 『철학 대 철학』이었는데, 정작 『철학 대 철학』에는 강연 내용이 나오지 않는다. 해당 책에는 여느 철학사 책에서 베낀 것처럼 비교적 멀쩡한 내용이 나온다. 강신주 본인도 본인이 하는 이야기가 정상이 아님을 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야기는 또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진짜 중요한 게 따로 있는데, 강신주의 미친 강연 내용이 강신주 고유의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내가 석사과정 때 강신주의 강연을 동료 대학원생에게 알려주니, 역시나 그 대학원생도 토할 것 같은 표정을 지었는데, 어디서 찾았는지 강신주 강연 내용이 외국의 어떤 프랑스 철학 전공자로 추정되는 정체불명의 인물의 써놓은 글이라는 것을 찾아서 나에게 알려주었다.

(이에 대해 프랑스철학 전공자는 러셀과 크립키에 관한 해당 내용은 프랑스철학 전공자가 아니라 ‘오사와 마사치’라는 일본 사회학자가 한 말임을 알려주었다. 해당 내용이 실린 오사와 마사치의 책은 한국에서 『연애의 불가능성에 대하여』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어 출판되었고, 여기서 정치적 스펙스럼에 대한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고 한다.)

하여간, 강신주의 러셀과 크립키 강연에 대하여 학생들은 충격적이라는 반응을 보였는데, 이것을 보고 내가 강의를 그렇게 잘한 것은 아니더라도 올바른 방향으로 수업을 이끌고 있음을 알았다. 서울 시내에 있는 어중간한 학교의 철학과 학부생들이 철학도 쥐뿔이나 모르는 주제에 다른 과 사람을 만나면 자기가 철학과 다닌다고 더럽게 뻐기며 철학을 가지고 인생이 어떠니 낭만이 어떠니 하며 학과 단위로 지ㄹ염병을 한다는 소식을 가끔씩 전해 듣는다. 그런데 내가 맡은 수업에서는 학기 시작하기 전까지 러셀이 누구인지 크립키가 누구인지 이름도 듣지 못한 학부생들이 불과 한 학기 강의도 다 듣지 않고도 강신주의 강연 내용을 일부 전해 들은 것만으로도 그토록 거부 반응을 보였다. 이것만 보아도, 학생들이 철학에 대해 올바른 태도를 가지는 데 내가 약간이라도 기여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2024.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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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철학 수업을 올바른 방향으로 하고 있다는 증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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