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 생명 마음> 수업 준비를 하느라 에른스트 마이어의 『이것이 생물학이다』라는 책을 훑어보았다. 책의 앞부분에는 마이어 개인의 일화가 서술되어 있다.
의과대학 학생이었을 당시 나는 의학에 심취해 있었고 너무나 바빠 ‘생물학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무엇이 생물학을 과학으로 만들어주는가’와 같은 근원적인 질문에 신경을 쓸 틈이 없었다. [...] 임상에 들어가기 전 단계의 시험을 마친 후 나는 의학을 접고 동물학(그 중에서도 새를 연구하는 조류학)으로 전공을 옮겨 베를린 대학교에서 철학 과목들을 수강했다. 실망스럽게도 생명과학의 문제와 철학의 문제 간에는 아무런 다리도 놓여 있지 않았다. [...] 1920년대와 1930년대에 걸쳐 훗날 ‘과학철학’이라고 불리게 되는 학문 분과가 생겨났다. 1950년대 내가 이 분야를 접하게 되었을 때 다시 한번 크게 실망하고 말았다. 그것은 과학철학이 아니었다. 논리와 수학, 그리고 물리과학의 철학일 뿐이었다. 생물학자들의 관심사와는 거의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14-15쪽)
과학사를 정립하려던 많은 학자도 생물학을 오해하기 십상이었다. 1962년 토머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가 출간되었을 때, 나는 그 책이 왜 그토록 큰 반향을 일으켜야 하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쿤이 한 일이란 기존의 과학철학이 가지고 있던 비현실적인 명제들의 일부를 논박하고 역사적인 요소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뿐이었다. 하지만 그가 대안으로 제시한 것들도 비현실적이기는 마찬가지였다. 생물학의 역사에서 대변혁이 과연 언제 있었으며, 쿤의 이론이 말하는 이른바 정상과학(normal science)이 언제 장기간 존재했는가? 내가 알고 있는 생물학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물론 1859년에 출간된 다윈의 『종의 기원』이 혁명적이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진화에 대한 개념들은 이 책이 나오기 한 세기 전부터 이미 있어온 것들이었다. 또한 진화적 적응을 설명하는 중심 메커니즘인 다윈의 자연선택론은 『종의 기원』 출간 이후 한 세기가 지나도록 제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 시기 동안에도 작은 변혁들은 있었지만 ‘정상’과학의 시기는 없었다. 쿤의 명제가 물리과학에는 통할지 모르나 생물학에는 맞지 않는다. 물리학의 배경을 갖고 있는 과학사학자들은 삼세기에 걸친 생명체에 관한 연구에 무슨 일들이 벌어졌는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것 같다. (18-19쪽)
마이어는 1904년생이다. 마이어가 의학을 그만두고 베를린대학에서 철학 수업을 들었을 당시라면, 아마도 논리경험주의(베를린 학파) 쪽 사람의 수업을 들었을 것이고, 수업 내용이 죄다 논리학, 수학, 물리학이었을 것이다. 마이어가 다시 철학에 관심을 가졌을 1950년대라고 해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1950년대는 칼 포퍼의 철학이 잘 나가던 시기인데, 포퍼가 반증가능성의 사례로 언급하는 것도 에딩턴의 관측 같은 것이었으니 그게 생물학과 무슨 상관인가 싶었을 것이다. 1960년대 토머스 쿤이 한 이야기도 대부분 물리학에 관한 것이었다.
옛날 선생님들이 농담으로 특정 대학 물리학과 출신이어야만 과학철학 교수가 되는 거냐고 말씀하시던 시절이 있었다고 건너 건너로 들은 적이 있다. 실제로 특정 연령대 이상에서는 과학철학 연구자의 대부분이 물리학과 출신이다. 나의 전 지도교수님도 물리학과 출신이고, 현 지도교수님도 물리학과 출신이다. 한국 과학철학계에 물리학과 카르텔이 있어서 그렇게 된 것인가? 아마도 그런 것은 아닐 것이고, 유입된 인력 중에 물리학과 학부 출신이 많아서 산출된 인력도 그러했을 것이다. 물리학도 중 일부는 과학철학을 접하고 자기 분야와 관련된 이야기라고 생각했을 것이지만, 다른 분야 이공계 학생들은 과학철학을 접하고도 ‘그래서 이게 나와 무슨 상관인가?’ 싶었을 것이다.
학부 과학철학 수업이 다른 전공보다 물리학도들에게 더 친화적이라는 것은 요새에도 통용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몇 년 전에 과학철학 학부 수업을 하던 동료 대학원생에게서 들었던 이야기가 있다. 수업 끝나고 몇몇 학부생들이 와서 질문도 하고 자신의 소회도 털어놓았다고 하는데, 자기가 배우는 분야에 대해 답답함이 해소되는 느낌이었다고 말하는 학생도 있어서 수업에 대해 책임감을 느끼게 되었다는 내용이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어느 학과 학생들이 그러더냐고 물었다. 동료 대학원생은 주로 물리학과 학생이었다고 답했다.
마이어의 일화를 참고해 보자면, 학부 수업에서 특수 분야에 관한 과학철학을 다루는 것도 고려할 만할 것 같다. 과학철학을 일반 과학철학(설명, 법칙, 방법 등 일반적인 주제)과 특수 과학철학(물리학, 생물학, 화학, 경제학 등 특정 분야의 쟁점)으로 나눈다면, 학부 과학철학 수업에서 하는 내용은 대부분 일반 과학철학에 관한 것이다. 왜 그런가? 일반 과학철학을 다루기 전에 특수 과학철학을 다룰 수도 없고, 일반 과학철학에 어떤 주제가 있는지 소개하는 것도 15주 안에 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학부 수업에서 특수 과학철학을 한 주 정도 다루는 선생님들도 있기는 하지만, 학부 과학철학 수업을 한다면 일반 과학철학 위주로 갈 수밖에 없다. 그 중 상당 부분은 청년 시절의 에른스트 마이어가 ‘이게 생물학하고 무슨 상관이야?’라고 생각할 만한 내용이다.
학부 수업의 개설이나 운영을 지금보다 탄력적으로 할 수 있다면, 학부에서도 특수 과학철학의 문제를 학생들에게 소개할 수 있을 것이다. 가령, <생물학도를 위한 과학철학>이라든지, <경제학도를 위한 과학철학> 같은 수업을 개설할 수 있다면 어떨까? 일반 과학철학의 문제는 기존 수업의 절반 정도만 다루는 대신, 물리학에서는 이러는데 생물학(또는 경제학)에서는 왜 달라지는지 소개하는 방식으로 한 학기 수업을 운영한다고 해보자. 그렇게 되면 다양한 전공의 학생들이 과학철학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될 것이다.
* 참고 문헌
에른스트 마이어, 『이것이 생물학이다』, 최재천 외 옮김 (바다출판사, 2016).
(2025.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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