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12/06

단군술 후기



집에 있던 ‘단군술’이라는 북한 술을 다 마셨다. 의외로 괜찮은 술이었다.

20년쯤 전에 부모님이 평양에서 관광하고 오면서 자잘한 북한 물품을 사 오셨는데, 그 중 하나가 단군술이었다. 아무도 그 술에 손대지 않아서 주방 찬장 한구석에 20년 동안 있었다. 어머니와 동생은 거의 술을 못 마신다. 아버지는 젊어서 과음으로 자주 실수하셨지만, 술 자체를 좋아하는 것은 아니어서 집에서는 술을 잘 마시지 않았다. 나는 집에서 혼자 술을 자주 마시지만 북한에서 만든 술을 안심하고 마실 수 있는지 의심스러워서 단군술에 손대지 않았다. 병 표면에 붙인 종이의 상태부터 안 좋아서, 술을 잘못 마시고 눈이라도 멀면 어쩌나 싶어서 손대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게 20년 동안 찬장 한구석에 술이 있는 것만 보다가 몇 주 전에 북한 술의 맛은 어떤지 괜히 궁금해졌다. 관광상품으로 판매한 것인데 설마 메탄올을 넣었을까 싶기도 했고, 약간 문제가 있어도 한 잔 정도는 먹어도 될 것 같았다. 그렇게 뚜껑을 열었는데, 뚜껑이 제대로 잠겨 있지 않았다. 누군가 뚜껑을 딴 게 아니라 처음부터 밀봉이 제대로 되지 않았던 것 같다. 한 잔 마셔보았다. 도수가 25도라고 써 있는데 별로 독하지 않았다. 알코올이 날아가서 그런가? 어머니께도 한 잔 권했다. 어머니는 목구멍부터 뱃속까지 뜨거운 것 같다고 했다. 다행히 알코올이 많이 날아가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나도 한 잔 더 마셔보았다. 맛도 괜찮고 향도 괜찮고 진로 소주보다 목 넘김도 좋은 것 같았다. 그렇게 반 병 정도 마셨고, 추석 연휴 때 나머지를 다 마셨다.

단군술 병에 붙은 종이에는 “고려 민족의 시조-단군이 마시던 아달샘으로 만든 도토리 술입니다”라고 써 있다. 단군릉 같은 것이나 만들어내는 북한 놈들이라고 해도 차마 단군이 마시던 술이라고는 못 하고(단군이 실존 인물이든 아니든 증류주를 마셨을 수는 없다), 단군이 마시던 샘으로 만든 술이라고 했다. 그런데 도토리 술이라니. 도토리로 묵이나 만드는 줄 알았지 술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은 처음 알았다. 북한에는 쌀이 부족해서 도토리로 술을 만드나? 그렇다면, 밤농사 지역에서 벌레 먹은 밤으로 술을 빚고 증류해서 소주를 만들 수도 있지 않을까? 당장은 아니고 언젠가 밤으로 소주를 만들어보겠다는 구상을 어머니께 말씀드렸더니, 어머니는 나보고 미친 놈이라고 욕을 하셨다. 내가 대학원 그만 두고 술 만들겠다는 것도 아니고 당장 하겠다는 것도 아닌데, 하여간 나는 그렇게 욕을 먹었다.

* 뱀발

2023년에 서울시교육청에서 독서토론 프로그램에서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었다. 그 아르바이트를 하기 위하여 교육청에서 열 시간 정도 연수를 받았다. 거기서 중고등학교 교사들의 토론・토의 교육 사례들을 접했는데, 그 중 약간 충격적인 사례가 있었다. 가정 과목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어떤 이상한 책을 읽고 남한과 북한이 통일하면 식문화에 어떤 변화가 생길지를 토론한 사례를 보여준 것이다.

상식선에서 생각해 보자. 북한의 전통 음식이라면 모르겠지만, 해방 이후 북한에서 새로 만든 음식이라는 게 딱히 맛있을 것 같지 않다. 그러니 통일이 된다고 해도 남한에서는 북한 음식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을 것이다. 북한 사람들이 고기를 더 많이 먹을 수는 있겠다.

그런데 해당 수업을 담당한 가정 교사는 통일이 되면 남・북한의 영양 불균형이 해소될 수 있다는 내용의 토론 자료를 학생들에게 제시했다. 남한 사람들은 필요 이상으로 많이 먹으니 고만 쳐먹고 살 좀 빼고, 북한 사람들은 필요한 만큼 못 먹으니 밥 좀 잘 먹이자고 하면 될 것을, 마치 남한 사람들의 영양 불균형과 북한 사람들의 영양 불균형이 대칭적이고 동등한 것처럼 서술한 뒤 통일되면 서로 보완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NL식 통일 농업도 아니고, 그런 정신 나간 소리를 하는 교사가 최근까지도 교육 현장에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단군술을 마셔보니, 그 가정 교사가 통일 농업 같은 소리 말고, 통일 주류사업 같은 소리를 했다면, 그래도 정상적인 이야기 비슷한 것을 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학생들 상대로 하는 토론 수업에서 그런 소리를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2025.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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